완도와 이어진 유물, '해양고대사' 연구가 필요한 이유
[완도신문 정지승]
그 당시 영산강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되면서 전남지역 해안가 일대의 유적발견 가능성이 제시되면서 완도에서도 처음으로 확인된 고대유적이었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은 실로 우연한 발견이었다. 1978년 주한미군 소속 공군 상병이던 그렉보웬은 동두천 군부대 가수로 활동한 한국인 연인과 한 겨울 한탄강에서 캠핑하던 중에 커피를 마시려고 코펠에 물을 끓이기 위해 주변에서 돌을 모았다.
그때 이씨가 주워 온 이상하게 생긴 돌을 보고 낌새를 알아차린 보웬은 그것을 챙겨 프랑스의 고고학 권위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 교수의 소개로 서울대 인류고고학과 교수에게 유물을 보내 조사를 요청했는데, 그 돌이 약 30만 년 전 것이라고 추정된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전곡리 주먹도끼'로 밝혀졌다. 전곡리 일대에서 유물 4500여 점을 획득하는 성과를 낸 것으로, 이 발견은 당시 전 세계의 고고학계를 완전히 뒤엎은 대사건이었다.
그런데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아슐리안식 석기가 발견되어 이전까지 정설로 인정받던 모비우스 학설이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이 일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세계적인 학자들까지 한국에 와서 석기들을 감정하고 진품임을 인정했다.
아슐리안형 석기보다 더 이전의 석기를 올도완(Oldowan) 석기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먼저 발견된다. 이때 조악한 올도완 석기기술을 가지고 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고인류가 보다 발전된 방식의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을 아슐리안형 석기라고 한다. 모비우스 라인은 이런 증거를 잘 설명하는 이론이라서 고인류학자들은 오랫동안 그것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아슐리안 석기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 전곡리에서 아슐리안 석기와 상당히 닮은 손도끼가 발견되면서 학계의 큰 논란이 됐다. 이를 계기로 연이어 중국과 유럽에서도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됐고, 모비우스 학설은 폐기되기에 이른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가면 관람 시작부분에 전곡리에서 출토된 뗀석기가 처음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그만큼 전곡리 유적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게 된 것이다.
우리지역의 구석기 유적의 발견으로 영산강유역의 고대인류와의 연관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완도의 사수도 해역의 고대인의 활동영역은 우리가 생각한 그 이상의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최초의 아웃도어의 삶을 살았던 고대인류, 자연은 그들에게 위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빗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밤하늘의 별, 오감을 충족한 그들의 삶은 완도의 바다에서 창의적인 삶이 정착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이제, 완도의 인류고고학 연구는 더 이상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만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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