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한 가운데에서 커리어를 펼치다
Q :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에서 아랍지역 사회학 석사를 했다. 왜 아랍 문화권이었나?
A : 고1 때 가족들과 함께 오만에서 2년 반 동안 거주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있는데 처음 공항에 내려 우리가 살 동네로 가던 중 가로등이 없어 어두운 길에서 검은 히잡을 쓴 여성들을 보고 귀신인 줄 알고 소리를 질렀다.(웃음) 아버지께서 그들의 의상에 대해 설명해줘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곧 오만이 좋아졌다. 옆집에 살던 이스마라는 동갑내기 소녀와 친구가 됐는데, 난 아랍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이스마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매일같이 만나 2시간씩 산책을 했다. 이스마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랍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현지인들과 가까워지며 서양인들이 지닌 아랍 문화권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무척 싫어하게 됐다. 그 호감을 바탕으로 아랍 전문 기자를 꿈꾸기도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랍어와 아랍지역학을 공부했다.
Q : 아랍에미리트(UAE)에 가서 취업할 결심은 어떻게 했나?
A : K-장녀라 독립적이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타국으로 나가는 데 두려움은 없었다. 가급적 전공을 살려 취업하고 싶었는데, 아랍어나 아랍지역학 관련 업무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일해보는 것도 전공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UAE를 선택한 것은 예전에 살았던 오만과 가깝기도 했고, 대학원 졸업 당시 UAE가 우리나라와 많은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어 기회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랍 지역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고 느껴 여기서 취업할 기회가 생겼을 때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부모님과 형제는 계속 한국에서 거주 중인데, 휴가차 아부다비에 종종 놀러 온다.
Q : 현재 어디에서 일하고, 어느 곳에서 거주하는지 궁금하다.
A : 내가 재직 중인 ‘나와 에너지 컴퍼니’는 친환경 도시인 마스다르시티라는 지역에 있다. 마스다르시티는 UAE가 2006년 건설을 천명한 탄소 제로 도시로, 아부다비 남동쪽 17㎞ 사막에 면적 6㎢, 인구 4만 명 규모로 만든 계획도시다. 태양열 등 신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전기차만 운용하는 세계 최초의 탄소 배출 제로 도시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도시기도 하다. 집은 회사에서 10분 떨어진 라하 비치에 있는데, 아이 학교와 차로 10분 거리인 완벽한 곳이다. 우리 동네는 굳이 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아도 될 만큼 웬만한 편의시설이 동네에 구비돼 있어 편리하다. 아파트 단지 내에 수영장과 거주자 전용 바닷가도 있어 아이들이 지내기에 매우 좋다.
Q : 어떤 비자로 일하고 있나?
A : 모든 외국인은 취업을 하면 2년 동안 살 수 있는 거주비자가 나온다. 2014년 UAE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 차례 연장했는데, 나와 우리 가족은 여기서의 삶이 좋아 가능한 한 오래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 요즘은 10년짜리 비자도 있어 한번 신청해볼 생각이다.
Q : UAE에 정착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 3가지는?
A :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라는 자세, 편견 대신 열린 마음, 쫄리지 않는 운전 실력. 한국에서는 어딜 가나 “겸손해야 한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UAE는 외국인 비율이 85%이다.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지닌 외국인들 사이에서 스스로 PR을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장점이 뭔지 알 리가 없다. 어떻게든 회사에 나의 성과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아부다비는 서울보다 넓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돼 있지 않아 운전이 필수다.
Q : 타국의 공공기관 취업이 까다롭지는 않았나?
A : 한국과는 달리 UAE의 회사들은 수시로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할 때 우리나라가 수출한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한창이었고, 발주처인 UAE 원자력공사와 팀 코리아(한국전력공사·한국수력원자력을 비롯한 한국 에너지 공기업, 건설사 및 협력사) 사이에서 업무를 조율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프로젝트의 기본 언어인 영어를 바탕으로 아랍어가 필요한 업무도 있어 지원한 다음 날 스카이프로 면접을 봤고, 그 다음 날 바로 채용이 확정됐으며, 회사의 긴급한 요청으로 대학원 졸업식도 참석하지 못한 채 출국했다.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진행돼서 채용 사기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다.(웃음) 그때는 원자력발전소 4기를 짓고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프로젝트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왔지만, 이제는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Q : 현재 하고 있는 직무에 대해 설명해준다면?
A : 우리 회사에는 70여 개국의 사람들이 모여 원자력발전소 운영이란 공동의 목표 아래 일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전략기획실은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온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각 부서의 현황을 파악하고 중장기 목표 및 전략을 수립·조정한다. 전 부서 상사가 나를 3년 넘게 놔주지 않아, 이 자리가 공석이 됐을 때 이번에도 못 가게 하면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놔서 옮긴 부서다.(웃음) 회사 임원들이 나를 두고 “She makes things done”이라 평했다더라. 나는 각 문화를 이해하고 이해 당사자들의 요구 사항을 반영하며 일을 진행시키는 것엔 자신 있다. 첫 직장이고, 10년째 일하는 중이다.
Q :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UAE에 왔을 때 통역을 하고 행사의 사회를 봤다. 이 행사를 통해 어떤 보람을 느꼈나?
A : 한국으로선 첫 수출 원전인 UAE 바라카 원전 1·3호기 완공식을 기념하는 행사로, 원전 운영사인 우리 회사에서 주최했다. 2018년 3월 문 전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는 원전 1호기 완공식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고, 2023년 1월 윤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는 원전 3호기 가동식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두 나라의 협력 관계를 이어가고자 양국 대통령과 내각 구성원들이 모두 참석한 중요한 행사였다. VVIP 행사였기 때문에 극비로 진행됐고, 행사 기획자가 나에게 대본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테스트였다.(웃음) 나는 아랍어로, 동료인 현지인 친구는 한국어로 진행을 맡았다. 양국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특히 UAE 대통령이 우리의 행사 진행을 보면서 우리가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했다더라. 이 행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첫 번째 행사가 끝나고 UAE 대통령이 나를 따로 불러내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과 5년 후의 두 번째 행사에서 그가 우리를 기억하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준 것이다.
Q : 중동 국가 고유의 여성 차별적 문화를 일하면서 혹은 일상생활에서 느낀 적이 있나?
A : 우리가 흔하게 중동에 가지고 있는 편견은 ‘종교적이다, 보수적이다, 여성 차별적이다’라는 것인데, UAE는 외국인 비율이 85%라 전통문화와 글로벌한 문화가 혼재돼 있다. 다른 중동 국가들보다 많이 열려 있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우선 무슬림이 아닌 여성은 히잡을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늘 긴팔 긴바지 정장 차림으로 출퇴근한다. 회사 정책적으로도 성차별 금지에 관한 조항이 마련돼 있기에(인사 매뉴얼에 ‘성차별 발언 시, 1회 경고 혹은 바로 해고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성차별적인 발언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심각한 경우에는 회사뿐만 아니라 UAE에서 추방당할 수도 있다. 여성의 기술직 진출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으며,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조명해주는 분위기다.
Q : 근무하는 기관에 외국인 비율, 여성 비율은 어느 정도 되나? 대나무 천장이나 유리 천장을 느낀 적은 없는지 궁금하다.
A : 자국민 의무 고용 정책이 시행되면서 외국인 비율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현재는 50:50 정도 되는 것 같다. 원자력 산업 특성상 기술직이 많고 남성의 비율이 여전히 높지만 최근에는 많은 사무직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기술직 진출이 매년 높아지고 있다. 사내에서는 차별을 느낄 때가 없지만, 처음 이민국 사무실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은 때가 생각난다. 내 비자 발급을 담당한 현지인 직원이 내가 아랍어를 하는 줄 모르고 동료에게 “얘 눈 정말 작다”며 신나게 외모 평가를 하며 웃더라. 너무 열받은 나머지 아랍어로 “내 눈이 어떤데? 네가 보는 건 나도 다 볼 수 있는데? 이민국에서 일하면서 인종차별 해도 돼?”라고 되받아쳤더니 당황해 얼굴이 빨개진 채 사라지더라.(웃음) 옆에 있던 직원이 대신 사과했다.
Q : 임신, 출산,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좋은 환경인가?
A : UAE는 가족을 우선시하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기 때문에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불평등을 겪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해나가고 있다. 현재는 3개월의 출산휴가 이후에 아이가 18개월이 되기 전까지는 2시간 단축 근무가 적용된다. 필요한 경우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있고, 업무에 지장이 없다면 일정 기간 이상의 재택근무도 허용된다. 가족과의 시간을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일하면서도 임신, 출산, 육아를 하는 데 큰 장애물은 없는 편이다. 워킹맘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어 아이로 인해 자리를 비워야 할 때도 어렵지 않게 양해를 구할 수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상사나 동료들도 많이 도와주는 편이다.
Q : 이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다면?
A :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일하면서 문화적·언어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오해나 문제에 직면하며 좌절을 느낄 때가 있지만, 또 그것을 극복해나가며 새롭게 배우는 것들에서 기쁨을 느낀다. 한국에만 있었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것들이라 생각하면 고통만큼 값진 경험이다.
Q :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직장인가? 정년까지 다닐 생각이 없다면, 제2의 커리어는 어떻게 구상하나?
A : 나는 정년을 보장받는 직장이 좋은 직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UAE는 한 회사에 오래 있으면, 그 사람이 실력이 없어 다른 회사에서 데려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근속 15년이 되기 전에, 원자력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나에게 맞는 자리를 찾고 싶다. 한국인이 필요했던 자리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Q :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 이제부터 당신의 야심이 향할 곳은?
A : UAE에서 만난 한 세르비아 여성이 육아하느라 몇 년 째 경력 단절이었는데, 내가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서 구직에 도전해 원하던 회사에 취직한 것을 보며 뿌듯했다. 국적이 어떻든 많은 여성에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내가 갈 곳이다.
Q :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하는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A : 겸손하지 말고, 내 의견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타국에서 살아남으려면 겸손할 때와 겸손하면 안 될 때를 잘 구별해 자기 PR을 강하게 할 줄 알아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싫은 것엔 웃지 말고 NO하라. 가끔 한국 여성들이 거절하고 싶을 때, 그냥 웃으면서 NO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이 무안해할까 봐 그런 것이지만 상대방은 오해할 수 있다. 웃지 말고 의사를 확실히 전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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