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일에 체념하지 않을 용기
[장순심 기자]
문득 삶에 치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나이가 삶의 고통이나 아픔을 무디게 할 거라는 것은 완벽한 오류다.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에게나 슬픔과 아픔의 크기는 같다. 오래 세상을 살펴온 사람의 눈치나 요령으로 태연한 척, 괜찮은 척 하도록 몸에 익혔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 어떠냐는 질문에 '그만그만해요' 혹은 '괜찮아요'라는 상투적 인사를 던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아주 잘 살죠~' 답을 하고는 가볍게 '농담!'이라며 경쾌하게 냉소를 날리고 싶어진다.
▲ 로기완을 만났다(리마스터판), 조해진(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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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죽을 만큼 힘든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연민, 애증, 인내, 수치심과 분노, 고통과 견딤, 공감과 연대, 사랑 등을 삶의 의미와 연결하여 절실하게 표현한다. 문장은 오히려 담백하다. 인물들의 태도는 과하지 않은 가운데 진실되며 독자의 감정은 오히려 절실해진다. 인간의 감정의 언어는 읽는 내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탈북인 로기완의 인터뷰 문장은 나를 낯선 세계, 낯선 만남으로 이끈다. 그의 행적을 쫓기 위해 브뤼셀로 떠나고 그곳에서 '로'를 알고 있는 의사 '박'을 만나 그가 넘겨준 로의 일기를 보며 그의 행적을 재현한다. 마침내 스스로를 긍정하게 되는 한 달 동안의 '나'의 여정을 소설은 그리고 있다.
작가는 '위로의 언어로 기억되기 위해 쓰이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품 곳곳에 생존의 위협, 가난의 흔적과 '후회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보여주는 아픔과 외로움이 짙게 깔려있다.
소설에서는 세 가지의 아픔이 교차되며 이어진다. 너무나 외로웠던 탈북인 '로기완'의 아픔과 불우한 이웃이자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는 방송 출연자 윤주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자책하는 '나'의 아픔이 있다. 그리고 말기암 환자이자 아내를 아무도 모르게 떠나보낸 의사인 남편, '박'의 아픔까지.
"나는 늙었어요. 늙었다는 말의 의미를 아오? 감정이 다 사치가 된다는 뜻이에요. 남은 시간이 빤하니 저절로 그리 되어가는 거요. 관용이라면 관용이고 체념이라면 체념이겠지."
아내를 보낸 '박'의 이 외침은, 가족과의 소중한 삶의 기억이 이제는 그에게 따뜻하게 남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내와의 따뜻했던 시간이 더는 사치가 아니어도 될 거라 기대하게 된다. 체념으로 일관했던 그의 삶이 바뀔 수 있을 것만 같다. 더불어 나도 무분별한 관용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일에 날을 세워볼까 생각하게 한다.
로기완의 세상이든 윤주의 세상이든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안전한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사과와 귤을 사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하고 스타벅스에 갈 때면 내가 가도 되나, 되묻는다.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조금씩 압박으로 다가오는데 그것을 입 밖에 내기는 어쩐지 민망하다는 생각을 한다.
생존을 위협당하지는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던 것들이 어려워지고 있다. 상대적 결핍은 늘 가슴 한 구석을 그늘지게 만든다. '잘 살고 있냐?'는 물음은 '잘 살기 어렵지?'라는 의미가 진하게 배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뜬금없지만 날 선 감정을 담아 선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총선을 앞두고 온갖 달콤한 돈의 유혹이 넘실거린다. 한 병사의 억울한 죽음은 단호하게 외면하면서 정의를 외친다. 노동자의 인권은 외면하면서 그린벨트 해제와 재개발 약속은 쩌렁쩌렁하다. 159명 목숨의 진상은 외면하면서 300명을 내편으로 확보하기 위한 절차적 정당성을 말한다. 지금의 포장된 정치는 국민의 삶의 고통과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저는 우리가 그를 돕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것은 개개인의 고통이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부디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로의 자술서에 첨부된 박의 코멘트)
탈북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탈북자' 또는 '탈북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수가 3만을 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 미국 · 영국 · 호주 등지에 가서 사는 이들까지 합치면 10만 명은 족히 될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포용 정도는 외국인 이민자나 노동자보다 더 낮은 수치다(통계청, 한국의 사회동향 2023) .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어들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지나치게 허술하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도와 관계없이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들, 관습 혹은 단순한 호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커뮤니티, 실체도 없이 우리 삶의 테두리를 제한하고 경계 짓는 국적이나 호적 같은 것들은 혼자라는 위로를 줄 수 있겠지만 그 위로는 영원하지도 진실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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