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생' 지훈이가 고3이 되고 후회하는 이유
[서부원 기자]
▲ 지훈이의 학교 생활은 남다르다. |
ⓒ unsplash |
"어느 학교에나 극소수의 특별한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죠."
정치인을 꿈꾸는 지훈(가명)이가 동료 교사들끼리의 화제가 됐다. 고1 때까지는 그다지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고2 때 교내외 다양한 활동에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더니 어느덧 고3인데도 멈출 줄 모른다. 학급과 학생회 임원, 동아리 회장 등 쓰고 있는 감투만도 여럿이다.
그의 학교생활이 남달라 보이긴 한다. 종일 교과서와 문제집을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그의 책상 위엔 대개 일간 신문과 소설책 등이 놓여있다. 이따금 태블릿피시를 이용해 해외 언론의 칼럼이나 학술 논문 등을 검색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처음엔 교과 수행평가나 생활기록부 작성을 위한 자료를 찾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교과 수업이나 교내 비교과 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자기 좋아서 하는 '가욋일'이다. 내신 성적에 반영되는 수행평가에 소홀할지언정 호기심이 발동한 '자기 주도적 학습'엔 매사 열심이다.
뒤늦게 찾은 적성
'지금 깨달은 걸 고1 때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평소 그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푸념이다. 그땐 낯선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그에겐 자투리 시간 심심풀이 삼아 도서관을 찾아가 읽은 책과 신문, 정기 간행물, 인터넷 정보 등이 진로를 설정한 계기가 됐다.
지훈이의 손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매일 게걸스럽게 책을 읽었고, 다 읽고 나면 어김없이 메모장을 들고 교무실을 찾아왔다. 책의 내용에 관한 질문들을 한바탕 쏟아내기 위해서다. 그의 독서 분야가 워낙 광범위해 모든 교과 교사가 그의 질문에 대비해야 할 정도였다.
고2 1학기를 지나서는 주로 역사와 문학, 정치, 지리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꽂힌 듯했다. 그러다 보니 역사와 지리 전공자라는 이유로 내가 주로 그를 상대해야 했다. 나날이 질문의 수준이 높아져 대하소설과 해외 언론, 대학의 학술 논문 등에 등장하는 내용까지 포괄됐다.
개중에는 듣도 보도 못한 자료가 수두룩했다. 그저 질문에 대한 내 견해를 정리해 답변 삼아 건넬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그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며칠 짬을 두고 읽은 뒤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명색이 교사로서 민망했지만, 한편으론 귀한 배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의 상설 역사 동아리의 성격과 이름을 바꿀 계획입니다."
그의 느닷없는 요구에 동아리 지도 교사로서 순간 당황했다. 아무리 고2라지만 동아리에 갓 가입한 신입회원인데, 다른 선후배들과 20년도 넘은 동아리의 전통을 무시한 주제넘은 짓이라 여겼다. 다짜고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모습이라 조금은 불쾌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해였다. 동아리 회원들이 한데 모여 안건을 상정해 토론을 벌였고, 설득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물론, 모두 기꺼이 동의했고, 그런 뒤에 날 찾아온 것이었다. 지도 교사랍시고 동아리 활동에 미주알고주알 관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흔쾌히 수용했다.
그의 제안으로 인해 20여 년 전통의 '문화유적답사반'은 '현대사(史)랑'으로 간판을 고쳐 달게 됐다. 현장 답사라는 주요 활동은 변함없지만, 답사지를 현대사 관련 유적 위주로 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지금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건 오래전 역사가 아니라 현대사라는 인식에서다.
그가 동아리 회장으로 추대된 뒤, 답사 활동이 말 그대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박물관과 절집, 서원 등을 찾아다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가 정한 첫 번째 답사 주제가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었고, 연이어 '여순 사건'이 두 번째 답사지로 결정됐다.
답사를 떠나기 전 동아리 활동 시간에 소설 <태백산맥>을 함께 읽는가 하면, 제주 4.3 사건에 대해 주제 발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 한 시간 남짓 강의했고, 나머지 회원들은 돌아가며 소감을 공유했다. 모두 그가 기획하고 추진한 것이다.
그렇게 지난 1년 동안 다섯 차례 답사를 다녀왔다. 국립 대전현충원, 대전 골령골, 경산 코발트 광산, 대구 가창골 학살 터, 거창 사건 추모공원, 함양 산청 학살사건 추모공원, 구례 봉성산, 형제묘와 14연대 터 등 여순 사건 유적, 나주 동학농민군 학살 사죄비, 장흥 석대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박정희 대통령 생가, 다부동 전적지, 낙동강 철교, 대구 전태일 옛집 등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하나같이 파란만장했던 우리 현대사의 자취들이다.
그의 독서 편력이 동아리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스스로에겐 우리 사회의 변혁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했다. 정치인이 되어 꿈을 펼쳐보겠다는 그의 당찬 포부는 지난 1년 동안 그렇게 숙성되고 다져졌다. 확언하건대, 그는 결코 즉흥적이거나 이해타산적이지 않다.
이제 그는 고3 수험생이다.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수능을 위해 다 걸기 해야 하는 처지라는 이야기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전국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수능 대박'을 위해 내신 등급을 산출하지 않는 진로 선택 교과만 고3에 배정하는 등 나름의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일찌감치 수능 일정에 맞춘 시간표를 가동하는 곳도 있다.
그라고 불안하고 초조하지 않을까마는, 겉으로 봐선 무사태평이다. 지역에서 열린 '청년 정치인 토크쇼'에 참여하는가 하면, 얼마 전엔 미주 지역의 5.18 민주화운동 유적 답사를 위해 보름간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하교 시간은 여느 친구들과는 달리 정규수업이 끝나는 오후 4시 반이다.
며칠 전엔 뜻 맞는 친구와 함께 망우 역사문화공원을 다녀왔다고 했다. 과거 망우리 공동묘지로 불렸던 곳이다. 이곳 광주에서 가자면, 아침 일찍 서둘러도 하루로는 빠듯한 거리다. 이승만 정권에 희생된 죽산 조봉암 선생을 만나기 위해 겨울날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고3이 지금 그럴 때냐"며 짐짓 나무랐지만, 내심 대견했다. 독서를 통해 정치인을 알게 된 뒤 그의 묘소를 부러 찾아가 경의를 표한다는 건, 남녀노소를 떠나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는 그곳에서 유관순 열사와 한용운 시인, 방정환 선생 등도 뵐 수 있었다며 뿌듯해했다.
단언컨대, 지훈이는 정치인의 자질이 충분하다. 타고난 독서광에 호기심이 많고 배움을 즐긴다. 친구들과 모여 토론하는 걸 좋아하고, 주장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발표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옹호에 우선 관심을 보일 만큼 인권 감수성도 남다르다.
▲ 지금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건 그도 이미 잘 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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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철이 든 만큼 더 열심히 공부해야죠."
지금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건 그도 이미 잘 알고 있다. 유수의 대학에서 국제 정치나 사회학을 전공하고 싶어 하지만, 허황한 꿈이라고 스스로 고개를 떨구고 있다. 서울 소재 대학은커녕 지방의 국립대 진학조차 녹록지 않다. 그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고1 때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이과를 선택했다. 더는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수학과 탐구 등 선택 교과에 따라 대학 진학에 유불리가 명확해 여전히 유효하다. 미적분과 기하를 비롯한 이과 교과가 대입에 유리하다고 해서 그냥 다수의 선택을 따라간 것이다.
고등학교 과정의 절반이 지나는 고2 도중에 선택 교과를 변경하기란 쉽지 않다. 기초가 필요한 교과의 진도를 따라잡기도 만만찮을뿐더러 이미 '펑크 난' 내신 등급을 만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교과든 비교과 활동이든 여태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된 내용 또한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대입에서 그의 특출난 재능을 보여주려면 학생부종합전형 등이 제격이지만, 일찌감치 수능에 다 걸기 한 상태다. 수시 전형에서는 내신 등급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이 아무리 풍성해도 계량화된 내신 등급을 넘어서긴 어렵다. 더욱이 그의 남다른 학교 밖 경험을 지침상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할 수도 없다.
오늘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 전쟁>을 관람했다며 교무실을 찾아왔다. '누군가의 등을 긁어주기 위해 급조한 작품'이라는 그의 한 줄 평에 무릎을 치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퍼졌다. 그의 재능을 대입에 종속된 학교가 되레 억누르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하긴 전국의 '지훈이들'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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