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작은 인물 하나로 보는 ‘일리아스’

2024. 3. 8.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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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한국방송통신대 교수·문화교양학과)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군의관 마카온의 부상이
이야기 전개에 큰 역할 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전체 24권, 총 1만5693행의 분량부터 일단 압도적이다. 신들의 이름이 47가지, 지명이 232가지이다. 15개의 산, 34개의 강이 그 안에 그려지고, 사람은 이름이 언급되는 것만 해도 823명이다. 이쯤 되면 그냥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만 따라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주인공은 1권에서 벌써 전투를 포기한다. 그가 다시 무장을 갖추는 장면은 19권이 되어서야 그려진다. 그렇다고 읽기도 전에 책을 덮을 수야 없으니, 작은 인물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유명한 마카온(Machaon)이라는 인물을 짚어 이야기해보자.

마카온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로, 테살리아 지역에서 30척의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였다. 형제 포달레이리오스와 함께 희랍군 전체의 건강을 돌보는 군의관이다. 일리아스 4권에는 그가 판다로스의 화살을 맞은 메넬라오스를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희랍군 전체에서 의사가 단 두 명이라는 건 아무래도 좀 비현실적이다. 군의관뿐만이 아니다. 엄청난 식량과 물자를 책임지는 군수 담당자들도 없고, 군대는 오로지 100% 전투병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기후도 늘 일정하다. 날씨가 돌변하는 일은 오로지 직유에서만 언급된다. 아폴론의 분노로 인수공통 전염병이 창궐하는 1권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질병을 겪지도 않는다. 그렇다. 이것은 실제의 전장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전쟁 다큐멘터리 감독도 아니고, 종군기자도 아니다.

일리아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생생한 세계이다. 일리아스에서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하는 경우 그 결과는 즉사, 또는 경상 후 즉시 회복 말고는 없다. 다시 말해 중상을 입고 요양하는 사람도, ‘상이용사’들도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설정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인공적이지만, 이로 인해 전사의 마음가짐만큼은 단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전투의 결과는 죽거나 죽이거나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의관이 둘로 족한 이유이다. 하지만 마카온 입장에서는 이 점이 몹시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열심히 싸우다 그만 파리스에게 화살을 맞았는데, 다른 의사 포달레이리오스도 마침 전투 중이라 하는 수 없이 ‘야매’ 시술을 받게 된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마카온의 부상이 실은 일리아스의 전개에서는 큰 역할을 한다. 마카온이 후송되는 장면이 전황을 살펴보던 아킬레우스의 눈에 마침 들어온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에게는 그 부상자가 누군지 확실치 않았던지 파트로클로스에게 이를 알아오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때 아킬레우스의 부름을 받고 막사 밖으로 나오는 파트로클로스를 그리며 시인은 ‘이렇게 그에게 재앙은 시작되고 있었다’(11권 604행)라는 짧고 비감 어린 설명과 함께 그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심부름을 나간 파트로클로스는 부상자들을 직접 만나 치료해주기도 하고, 희랍군의 패색 짙은 전황도 두 눈으로 보게 된다. 막사로 돌아온 파트로클로스는 전우들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으로 아킬레우스에게 출전을 간청하고 승낙을 얻어낸다. 시인은 그의 애원을 두고 ‘어리석은 그가 자신을 위해 애원하려 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몹쓸 죽음이었다’고 말한다(16.1-47). 그의 죽음은 그만큼 공들여 준비되고 있다. 이 순간은, 내내 자기연민에 휩싸여 있던 아킬레우스가 이 시에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동정과 연민을 드러내는 시점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그의 승낙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부르고, 아킬레우스는 진노에 휩싸인다. 이후의 플롯은 아킬레우스가 품는 강렬한 정서들인 진노와 연민이 얽히고 풀리며 절정을 맞는다. 물론 일리아스를 구전 전쟁 서사시의 하나 정도로, 또는 개별 사건들의 단순한 총합 정도로 보고 싶다면 이런 이야기는 잊어도 좋다.

이준석(한국방송통신대 교수·문화교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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