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준의 퍼스펙티브] 실손보험이 왜곡시킨 의료시장부터 바로잡아야

2024. 3. 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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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 갈등 해법은 없나


임재준 서울대병원 공공부원장·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
의대 정원 증원을 놓고 정부와 전공의들이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다. 법정 최고형까지 언급하는 정부의 거듭된 압박에도 9000명 이상의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임용계약을 포기하고 병원을 떠났다. 의대생 1만 3000명가량도 휴학계를 내고 등교하지 않고 있다. “증원 규모를 2000명에서 단 한 명도 줄일 수 없다”는 정부에 맞서 “원점에서 재검토하자”고 요구하는 전공의들 사이에 타협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 이번 사태의 가장 가능성 높은 결말을 생각해보자. 정부는 2000명 증원을 관철하고, 병원과 학교를 떠난 전공의들의 면허는 정지되고 의대생들은 유급되는 것이다. 정부는 목표를 달성하겠지만, 대형 병원들의 진료가 장기간 대폭 축소돼 중증 및 암 환자들의 치료에 큰 지장을 받을 것이다. 상당수 전문의와 의사가 1년간 배출되지 않아 생기는 보건의료 체계의 혼란은 상당히 오래갈 것이다.

「 의사들은 돈 되는 비급여 선호
환자들은 너무 쉽게 의료 쇼핑

낮은 수가 방치 필수의료 기피
피부미용 등 쉬운 분야로 몰려

갑작스런 2000명 증원은 무리
단계적 증원 후 다시 검토해야

이번 사태는 정부와 의사에 반반 책임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일 대전의 한 의과대학 의학과 강의실이 텅 비어 적막한 모습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어떻게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날 수 있냐며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400명 증원 계획에도 파업했던 전공의들이 2000명 증원에 쉽게 찬성할 리 없다는 것을 정부도 알았을 테니 책임은 반반이다. 정부는 지금의 의대 정원을 유지할 경우 2035년에 의사 1만 명이 부족할 것이라고 추계한다. 의료 취약 지역의 의사 인력을 확보하려면 5000명이 더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부 주장의 근거가 된 세 가지 연구는 미래 인구 구조, 소득 및 건강 수준, 의료 기술 등에 대한 다양한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어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의사가 모자라는 것도 문제지만, 남는 것도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 의사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형 병원조차 영상의학과 의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어느 지방의료원은 신장내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 투석실을 폐쇄했다. 수 억원의 연봉을 제시해도 의사를 구할 수 없는 지방 병원들의 이야기도 가짜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10년 전만 해도 이런 뉴스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된 것일까.

김영옥 기자

소아청소년과 ‘오픈 런’은 의대 정원 증원의 주요 근거 중 하나다. 그런데 2003년 15세 미만 아이들이 962만4097명이었는데,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3582명이었다. 10년이 지난 2013년에는 아이들 숫자가 743만3119 명으로 크게 줄었지만,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5051명으로 늘었다. 다시 십년이 지나 2023년에는 아이들 숫자가 566만3861명으로 줄었는데,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6385명으로 더 늘었다. 그러니 소아청소년과 ‘오픈 런’의 원인은 전문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고된 진료와 낮은 수가를 방치해 전문의들이 소아청소년 진료를 접고 피부미용 분야나 요양병원으로 향하게 한 역대 정부의 정책 실패가 더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손보험이 만든 거대한 비급여 시장

몇 해 전에 허리디스크가 도져 집 근처 의원을 찾았을 때 창구 직원이 처음 물어본 말은 실손보험이 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실손보험이 있다면 이러저러한 검사와 처치를 받을 수 있다고 안내했다. 이렇게 실손보험을 기반으로 의사와 환자가 함께 만들어낸 거대한 비급여 시장이 필수의료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5대 보험사가 실손보험을 통해 1차 병원(의원)에 지급한 비급여 처치 비용은 2018년 1조2110억에서 2022년 2조2222억으로 불과 4년 만에 82.5% 증가했다. 당연히 비급여 진료를 주로 하는 의사들의 수입이 늘었고, 의사들은 힘들고 위험한 필수의료를 떠나 편하고 수입이 좋은 비급여 진료로 방향을 틀었다.

실손보험을 가진 경증 환자들의 지나친 응급실 방문은 ‘응급실 뺑뺑이’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정부가 이야기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국민도 꼭 필요하지 않은 병원 방문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1인당 의료기관 방문 횟수는 2022년 20.6 회. 단연 세계 최고인 데다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22년에 365회 이상 병·의원을 방문한 환자가 2260명이나 됐고, 이들의 평균 외래진료 횟수는 무려 452회였다.

비정상 의료전달체계 바로잡아야

이런 과다한 병원 이용에 더해서 무너져 내린 의료 전달체계가 지역의료 공동화 현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집 근처 의원에서 형식적인 의뢰서 하나만 받으면 어디에 살든, 어떤 질병이든, 길어야 몇 주 안에 소위 빅5 대형 병원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과도한 접근성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지역별 의료 서비스 불균형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이는 의사를 늘려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김영옥 기자

물론 의사들도 많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 의사들은 메르스 사태와 코로나19 위기 때 환자 진료를 자원하며 기꺼이 자기 생명의 위험을 감수했다. 그런 의사들이 의료 정책에 대해서는 너무 좁은 시야를 갖고 있어 안타깝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도 국민 건강 관점에서 접근하고 평가해야 한다.

진찰료나 수술료 등은 건강보험 수가가 낮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비급여진료에만 몰두하는 일부 의사의 모습은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인공수정체 삽입이나 도수치료가 정말 그렇게 많은 환자에게 필요한 것인지, ‘신데렐라 주사’와 ‘백옥 주사’의 효과는 과연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인지도 의문이다. 비대면 진료의 확대가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될지도 열린 마음으로 따져봐야 한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위기는 의사 수 부족보다는 분포의 문제일 수 있지만, 완벽히 이상적인 분포는 불가능하다. 아예 전공의 과정을 선택하지 않고 일반의로 피부 미용 시술을 하며 편하고 윤택한 삶을 추구하는 젊은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에 헌신할 의사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의료 이용량이 많은 노령인구도 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급작스러운 2000명 증원은 분명히 무리수다.

정부는 대학들의 수요조사를 근거로 이 숫자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학에 원하는 의대 정원 증원 규모를 묻는 것은 아이들에게 사탕을 줄 테니 몇 개씩 먹고 싶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 대학 이사장이나 총장은 증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우수한 학생을 유치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6년 동안 비싼 등록금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갖춘 의대 교육 무너질 수도

의대 교육이 부실해질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고려할 겨를도 없다. 110명인 현재 정원을 300명까지 늘리겠다는 대학도 있고, 40명을 네 배 가까운 150명으로 증원하겠다는 대학도 나온다. 정부 계획대로 2000명을 증원하면 의과대학들이 오랜 기간 노력해 어렵게 갖춘 의학교육의 틀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소그룹 교육, 심층연구과정, 모의환자 실습, 시뮬레이션 실습 등의 선진교육 기법을 폐기하고 수십 년 전의 획일적 강의실 수업 위주의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수업도 2부제로 해야 할지 모른다.

정부는 국립대병원 교수를 1000명 증원해서 해결하겠다지만, 벽돌 찍어내듯 교수 1000명을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다. 점진적이고 신중한 증원이 옳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던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한다. 의대 정원과 같이 중요한 문제라면 충분한 숙의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민주적인 절차가 필수적이다.

우선 내년에는 의학교육을 맡은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가 제시한 350명을 늘리는 건 어떨까.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정부가 증원의 근거로 삼는 논문의 저자인 서울의대 홍윤철 교수가 제안한 750명 증원도 고려할 수 있다. 이후 함께 다시 고민하자. 이것이 당장 눈앞에 닫친 파국을 막고 의학교육과 보건의료체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파국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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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준 서울대병원 공공부원장·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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