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인도·태평양의 민주주의 진흥을 위한 재단을 만들자
오는 18일부터 20일까지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2021년 12월 미국 주도로 시작됐다. 지난해 3월에는 미국·한국·코스타리카·네덜란드·잠비아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형식으로 2차 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는 미국이 아닌 국가가 단독으로 개최하는 첫 대면회의다. 그런 만큼 이번 회의는 민주주의 진흥을 위한 국제회의체로 정착하는 데 중요한 도약대가 될 전망이다.
민주주의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내리막길을 걷다 최근 하락을 멈춘 상태다. 미국의 비정부 기구인 프리덤하우스는 지난해 조사에서 34개국에서 민주주의 환경이 이전보다 개선됐고, 35개국은 후퇴 또는 보합 상태를 보인 것으로 평가했다.
■
「 18일 서울서 민주주의 정상회의
한국의 민주화 경험 전파 계기
외교자산 축적하는 전략적 투자
한반도 평화·번영 밑거름 될 것
」
또 영국의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는 2022년 167개국의 민주주의 이행 정도를 분석했는데, 완전 민주주의는 24개국으로 세계인구의 8%만이 여기에 속했다. 반면 불완전 민주주의는 48개국(37.3%), 혼합정권(hybrid) 36개국(17.9%), 권위주의 59개국(36.9%)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코노미스트는 불완전한 상태인 민주주의 국가를 포함해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자유와 기본적 인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개선 또는 확산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가 속한 동아태 지역 28개국 가운데 완전·불완전 민주주의 국가는 14개 나라로 중남미, 동유럽과 비슷한 상황이다. 아프리카와 중동은 세계 평균보다 뒤처져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무역의 필수조건
이런 상황에서 다음 달 서울에서 열리는 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시의적절하다고 하겠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과 함께 민주주의 확산과 진흥을 위한 국가들의 단결과 협력을 증진하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다.
민주주의의 진흥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대한민국의 근본 규범인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 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이후 70여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중견 국가로 성장한 데는 민주주의 가치를 체화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자유는 번영의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미국 아틀랜틱 카운슬이 작성한 2023년 ‘자유와 번영 지수’ 보고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번영하는 국가군은 모두 민주국가이고, 45개 권위주의 국가 가운데 10개 나라만이 ‘약간’ 번영하는 그룹에 간신히 들었다. 같은 지역에서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 간 경제 상황의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동유럽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과 러시아, 남미의 페루와 베네수엘라,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부룬디 간의 격차가 좋은 사례다.
최근 중국 경제가 부진한 이유 중 하나가 시진핑 체제의 권위주의 강화 때문으로 지적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장 극명한 사례는 남북한이다. 우주에서 한반도의 야경을 찍은 사진을 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남쪽의 환한 모습과 3대 세습의 전체주의 정권인 북쪽의 어두운 모습이 선명한 대비를 보인다.
한국은 협소한 국내 시장과 빈약한 자원으로 대외 무역을 통해 경제를 운영하는 무역 국가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해외 시장이 민주주의로 개방돼 투명하고 책임 있는, 그리고 예측 가능한 조건이 된다면 한국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 특히 한국 경제의 허파라고 할 수 있는 인도·태평양지역에서 민주주의가 확산하고 신장하면 그만큼 안정된 무역과 투자로 이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적 가치와 제도는 전쟁 억제 기능을 하고, 민주국가 간의 전쟁을 막는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확산은 역내 평화와 안정에도 기여하게 된다. 한국의 국익과 직결되는 요소인 셈이다.
한국은 두 세대 만에 산업화를 통해 중산층을 키웠고, 국민의 끈질긴 노력으로 권위주의를 극복한 민주화의 소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동남아를 비롯해 민주화를 추구하는 국가의 시민단체나 비정부기구(NGO)들은 이런 한국의 경험을 높이 사며 지원을 기대하기도 한다. 필자는 2월 초 인도·태평양지역 내 민주주의 진흥을 위해 2020년 창설된 서니랜드 이니셔티브(Sunnylands Initiative)의 제4차 서울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 기간 동남아에서 온 관계자들로부터 자국의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한국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끊이질 않았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고, 식민지에서 독립해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했다는 점에서 동남아 국가들이 한국을 롤 모델로 삼는 듯하다. 우리의 민주화 경험을 인·태 지역 국가들의 민주주의 역량 개발에 지원하고, 역내 민주주의 인프라 구축을 선도할 수 있는 조건이 이미 갖춰져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화 경험을 인·태 지역 국가들에 전파하는 작업은 외교 자산을 축적하는 현명한 전략적 투자가 될 수 있다.
민간 성격의 민주주의 진흥 재단 필요
이런 맥락에서 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한국의 민주화 경험을 확산하고 역내 국가들의 역량 강화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 외교자산을 축적하는 중요한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역내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한 가칭 ‘인·태 지역 민주주의 진흥재단’의 창설을 제안하고자 한다. 한국의 민주화 확산을 위한 정부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자칫 내정 간섭이라는 상대 국가의 반발을 가져올 수도 있다. 반면 초당파적인 지원을 통한 민간 주도의 재단은 민주주의 진흥을 위한 역량을 배양하고, 각국의 시민 사회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미국 의회가 초당적으로 설립한 ‘민주주의재단(NED)’과 대만의 ‘대만민주주의재단(TFD)’을 참고할 만하다.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는 정부는 개발원조(ODA)를 대폭 증액했고, 지난해 3월 열린 제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 인·태 지역회의에서 역내 민주주의 증진에 1억 달러(약 1330억원) 기여를 약속했다. 여기에 민간단체 성격의 ‘민주주의 진흥재단’은 한국이 인·태 지역의 민주화를 주도한다는 명분과 함께, 지속적으로 외국 민간단체들과 연계가 가능한 체계를 다각적으로 구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자유롭고 열린 인·태 지역 발전으로 연결돼 한반도의 평화와 경제적 번영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교부 차관·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당신은 죽는 날이라도 알지” 식물인간 딸 돌보는 엄마 폭언 | 중앙일보
- '아내 집단성폭행' 남편에 위로금 건네며 사진 찍은 인도 경찰 | 중앙일보
- '봉준호 통역사'도 여기 다녔다…토종 그녀 원어민 만든 비밀 [hello! Parents] | 중앙일보
- 오른쪽 가슴 만지는 관광객에 줄리엣 청동상 '수난'…무슨 일 | 중앙일보
- 푸마 왜 떴는지 알아? 그들이 후원한 '16세 무명선수' 정체 | 중앙일보
- "김신영과 많은 대화" 전국노래자랑 제작진이 밝힌 교체 이유 | 중앙일보
- 손흥민 "은퇴 전까진 결혼 안한다"…그가 꺼내든 아버지와 약속 | 중앙일보
- 출근 안하던 김범수 변했다…주7일 카카오 나오자 생긴 일 | 중앙일보
- [단독] '병력 절벽' 해군의 해법…병사 없는 '간부함' 띄웠다 | 중앙일보
- [단독]與 '험지' 호남에 전과 9범 공천…"줄줄이 비례만 몰렸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