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의 마음상담소] 다시, 봄
자살의 대인관계이론(interpersonal theory of suicide)을 제안한 저명한 심리학자 토마스 조이너는 자신이 혼자라 느끼는 ‘좌절된 소속감’ 그리고 자신이 민폐라는 ‘짐이 된다는 느낌’이 자살 위험을 높인다고 봅니다.
우리 뇌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감을 가지고 있을 때 안전감과 안도감을 느끼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에, 좌절된 소속감이 한번 건드려지면 거절과 거부에 점차 민감해지고 나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가 혐오 자극으로 느껴집니다. 노력을 들여야 하는 관계에 환멸이 나고, 때로는 나를 화나게 한 사람들에 복수하려는 공격적인 내용의 공상과 백일몽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어 오랫동안 응어리진 마음을 이고 지고 살아갑니다. 실제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화가 나고 힘이 들어서, 살아보려고 하는 생존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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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감 좌절돼도 노력은 내 자산
의미없는 분노에 시간 허비 말고
언젠가 힘든 다른 사람 도와주길
」
그러나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런 공격적인 백일몽은 우리 감정을 더욱 상하게 합니다. 비관적이며 날 선 마음으로 지내기에 그 곁에 남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마저 참 많이 다치게 합니다. 필연적으로 자살과 같은 자기파괴적인 생각들 역시 커집니다. 그렇기에 좌절된 소속감으로 내내 괴롭다가도, 늦지 않게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럴 일인가? 이 내가?’
당시 목표했던 소속감은 좌절되었을 지라도 그동안 들였던 노력과 역사는 그대로 나의 자산이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 좌절로 잠시 길을 잃을 수 있겠지만, 뇌에는 모든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뭐가 그렇게 다를까 싶겠지만, 오히려 나의 모든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고도 느끼겠지만, 이전의 뇌와 지금의 뇌는 완전히 다른 모습과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세상을 운용하는 동안 익혔던 지식과 지혜가 누적되어 체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소속의 욕구가 좌절되었던 것은 ‘전략’과 ‘환경’이 서로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엔 내가 늘 사용해오던 전략이나 경직된 생각들을 바꾸거나, 혹은 나의 환경이나 만나는 사람에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다시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도 머릿속 지식과 지혜는 가지를 뻗습니다. 이것이 막연히 추상적인 비유는 아닌 것이, 실제로 이 과정에서 뇌 내 신경세포인 뉴런이 다시 가지를 뻗어 다른 뉴런들과 손을 잡기 시작합니다.
우리 머릿속의 그 작고 가냘픈 뉴런들까지도 새로이 연대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켜 소속감이나 연결감을 찾기 위한 노력을 다시 해 주세요. 자꾸 사람들과 거리 두려 말고 공격적인 백일몽도 천천히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좌절과 실패, 슬픔에 함께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죄스러워 슬픔은 더욱 커지고 애써 사람들과 멀어지려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살의 대인관계이론 중 두 번째 요인, 짐이 된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어리석음과 실패, 당신의 존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진짜 이유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고난과 심리적 고통으로 지금 당장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왜곡되어 있을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마저 곡해하지 마세요. 심리학 용어로 이를 ‘투사(projection)’라고 합니다. 자기 실패로 괴로워하는 자기 마음을, 마치 다른 사람의 마음인 양 말합니다. 아니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은 사실 당신의 실패에 아주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솔직히 자신의 실패도 아닌데요. 당신이 좌절을 경험할 때 함께 고통스러운 이유는, 당신이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짐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당신의 성공에도 아주 뭐 그렇게 큰 관심은 없었을 겁니다. 그냥, 당신이 성공하고 싶어하니까, 그 마음을 알겠으니까 당신의 성공에 같이 기뻐하는 것 뿐입니다.
불행한 일들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기억해주세요. 너무 오래는 화내지 말고, 내내 슬퍼하지도 마세요. 그래야 하는 만큼만 그리하세요. 그 이후로는 잠깐씩은 같이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결심이 서면,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고 나를 밀어냈던 사람들에게 마음 한 조각도 주지 마세요. 더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자기 삶의 다정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흘려보내지 마세요. 그동안 축적해 온 나의 속 깊은 지혜를 믿고 나의 모든 순간에 정성을 다하는 지금이 당신의 봄입니다.
당신의 슬픔과 좌절로 누군가에게 짐이 된 적도 없으니 그리 미안해하지도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내미는 손을, 그동안 내가 뿌린 인덕의 결과물로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세요. 당신은 내내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됩니다. 나중에 좀 살만 해지면, 그때엔 또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당신이 도와줄 차례가 다시 옵니다. 사회에서 해야 할 일들이 좀 있습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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