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피해자가 어떻게 ‘싸우는 피해자’ 됐나

김남중 2024. 3. 7. 21:0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책과 길]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김진주 지음
얼룩소, 320쪽, 1만8000원
2022년 5월 22일 새벽 5시쯤 발생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 당시 CCTV에 찍힌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습.


20대 여성 김진주(가명)는 2022년 5월 22일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라고 알려진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 2023년 10월 20일 김진주는 국회 국정감사에 초청됐다. 그는 이 자리에서 “왜 판사가 마음대로 용서하냐”며 양형기준을 비판했고, 범죄피해자 보호·지원 대책을 촉구했다.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에서 김진주는 범죄피해자가 어떻게 ‘싸우는 피해자’로, ‘피해자들의 대변인’으로 나아갔는지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는 씩씩하고 통쾌하면서도 단단하다. 이런 피해자, 이런 ‘피해자 서사’는 처음이다. MZ세대는 범죄피해조차도 콘텐츠로, ‘부캐’로 만들어내는 것일까.


김진주는 범죄피해에 대해 숨기기나 침묵하기 대신 말하기를 선택했다. 그는 ‘작가 기저귀’라는 필명으로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사건에 대해 쓰기 시작했고, ‘네이트판’에도 글을 올렸다. ‘12년 뒤에 저는 죽습니다’라는 제목의 첫 글이 주목을 받으면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일시적으로 피해를 얘기하는 피해자는 있었지만 이렇게나 지속적으로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알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언론은 김진주에 주목했다. 기자, PD, 유튜버들의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뷰나 촬영에 적극 참여했고, 자신의 피해 영상을 공개하는 데 동의했다.

김진주는 수사와 재판에도 적극 개입했다. 피해자들은 대개 자신과 관련된 재판을 참관하지 못한다. 오지원 변호사는 “제가 19년차 법조인인데 증인이 아닌 경우 법정에 방청하러 온 피해자는 거의 못 봤어요”라고 말했다. 김진주는 달랐다. 모든 재판을 참관했다. “무슨 반항심이 들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이런 피해자도 있다는 걸 재판부에도 보여주고 싶었다… 오늘도 법정에서 가장 잘 보이는 중앙 자리에 앉기로 했다. 난 하나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가해자가 쓴 진술서나 반성문, 법정 발언 등을 꼼꼼하게 분석해 허위임을 밝히는 글을 수없이 써서 재판부에 제출했고, 가해자 관련 제보들을 공개했다. 자신이 폭력뿐만 아니라 성범죄 피해도 당했다는 걸 스스로 입증해 1심의 징역 12년형을 뒤집고 최종심에서 20년형 판결을 이끌어낸 건 특히 놀랍다. 미혼의 젊은 여성으로서 성범죄 피해를 드러내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범죄를 입증한 일반인이라니. 피해자가 추적하지 않았으면 그 사실은 영원히 묻혔을 거란 얘기가 떠돌았다.”

김진주는 피해 이후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문제는 가해자라고, 그리고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법체계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용감한 이야기는 다른 범죄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줬다. 이제 그는 범죄피해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피해자를 구하자’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고, ‘올해의 책’으로 꼽힐 만한 이 책도 써냈다.

2022년 5월 22일 전과18범의 돌려차기에 쓰러진 김진주는 숨고 침묵하고 두려움에 떨며 평생 희생자로 살아갈 뻔했다.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기 위해 싸우기를, 그래서 다른 피해를 막고 피해자들과 연대하기를 선택했다. 김진주의 이야기는 범죄피해로 사람이 희생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더 단단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윤경 계명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외상 후 성장’이라고 설명한다. “극심한 스트레스나 외상을 겪은 후에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해요.”

보복이 두렵지는 않을까. 김진주는 교도소 내에서 보복을 떠들고 있는 가해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책을 마무리한다. “걱정하지 마. 내가 죽더라도 나 같은 피해자들이 널 쫓아다닐 거야.” 김진주가 찾아낸 ‘용감한 피해자’라는 길은 이후 범죄피해자들에게 지도가 될 것이다.

김진주의 싸움을 기록한 이 책은 현행 사법체계의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범죄피해자 보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김진주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폭로하고, 기록 열람이나 양형 기준, 신상 공개 등이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비판한다.

“피해자에 대해서, 뭔가 아무런 이해도가 없는 사법체계가 원망스러웠어요.” 김진주는 피해자들의 알권리도 중요하다고, 보복 범죄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사건과 관련 없는 양형기준을 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2023년 10월 한동훈 당시 법무부장관의 전화를 받고 범죄피해자들에게 필요한 점을 정리해 전달하기도 했다. 법무부는 범죄피해 지원 TF팀을 만들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