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발 반도체 ‘빅뱅’…K반도체, 기회·위기 요인은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2024. 3. 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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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칩 공급망 다변화 낙수 기대
‘1등 강박’ 삼성, 산업 재편 밀릴라

“생성형 AI에 ‘티핑 포인트(튀어 오르는 시점)’가 왔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AI 반도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이 가열되고 있다. ‘갓비디아(엔비디아 독주를 일컫는 조어)’를 견제하려는 글로벌 빅테크 간 합종연횡이 활발하다.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탁월한 성과로 세계 반도체 시장 1위를 차지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안팎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생성형 AI의 티핑 포인트가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면서 삼성과 SK하이닉스에 동시다발적으로 다가온 기회와 위기 요인을 분석한다.

마크 주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2월 28일 LG전자 CEO인 조주완 대표이사 사장 등을 만나기 위해 서울 영등포구 LG트윈타워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기회 요인] 타도 ‘갓비디아’

AI 칩 공급망 다변화 수혜

엔비디아를 견제하려는 글로벌 빅테크 간 전략적 연합에서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빠지지 않는 옵션이라는 점은 기회 요인으로 분석된다. 최근 IT 거물들은 잇따라 한국을 찾아 삼성과 SK그룹 등 주요 경영진을 만났다. 지난 2월 말 마크 주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만나 AI 반도체와 생성형 AI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 1월에는 샘 알트만 오픈AI 대표가 삼성전자, SK 그룹 주요 경영진과 만났다. 이들이 비슷한 시기 잇따라 한국을 찾은 것은 엔비디아를 견제하려는 포석에 따른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엔비디아는 명실공히 AI 반도체 산업 절대 강자다. 그만큼 AI 반도체 산업에선 엔비디아 의존도가 높다. 생성형 AI에 주로 쓰이는 엔비디아 GPU는 게임에서 고화질 그래픽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고안된 칩이다. 생성형 AI 붐이 일자 GPU는 AI 칩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AI에서는 대규모 연산을 동시에 하는 병렬연산(Prallel Arithmetic)이 관건인데, 엔비디아 GPU가 이에 적합하다는 게 밝혀졌고 블록체인 기술 발전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GPU 기반 AI 칩은 가격이 비싸고 전성비(성능·소비전력)가 떨어진다는 게 약점으로 지목된다. 무엇보다 엔비디아 독점 공급 체제여서 칩 자체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 수준 난도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독자적인 반도체 개발에 나서는 이유다.

글로벌 빅테크의 공급망 전략에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빠질 수 없는 카드라는 점은 우리 반도체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AI 칩 한 종류로 볼 수 있는 HBM(High Bandwidth Memory·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AI 반도체 패키징 안에는 GPU로 엔비디아의 H100 또는 AMD의 MI300X가 들어가고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만든 HBM 칩이 장착된다. AI 반도체 패키징 구조에서는 GPU와 HBM이 서로 빛의 속도로 데이터를 주고받아야 하므로 빅테크에 HBM 수급을 위한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특히 삼성은 설계와 파운드리 부문 강자로 보기는 어렵지만 칩 설계부터 후공정까지 모두 가능한 세계 유일 종합반도체(IDM) 기업이라는 점이 SK하이닉스 대비 강점으로 평가받는다.

류수정 사피온 대표가 서울 중구 SKT타워에서 열린 출시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차세대 AI 추론용 NPU 칩 ‘X330’을 소개하고 있다. (사피온 제공)
GPU 대체 AI 칩 승부

AI 서비스 분화 가속화

생성형 AI가 티핑 포인트를 넘자 AI 서비스가 갈수록 세분화, 특화하는 점도 삼성과 SK하이닉스에 기회 요인이다. 엔비디아 GPU는 고용량 데이터 병렬연산에 강점을 보여 챗GPT 등 범용 AI에는 필수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AI 서비스 영역이 분화하면서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형·맞춤형 AI가 갈수록 주목받는다.

AI 서비스 전문화 추세에 맞춰 삼성과 SK하이닉스는 GPU를 대체할 수 있는 AI 칩 제조에 사활을 걸었다. 엔비디아 GPU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손익 구조 측면에서 물음표가 던져진 데다 AI 서비스 확장으로 대체 칩 수요도 늘고 있다.

여러 시장조사기관에서는 생성형 AI 분야 신경망처리장치가 점차 GPU를 대체할 것으로 내다본다. 글로벌 전략 컨설팅 기업 맥킨지에 따르면, 생성형 AI로 인한 글로벌 경제적 효과는 연간 최소 2조6000억달러(약 3393조원)에 이르며 한국에서 경제적 효과는 100조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맥킨지는 GPU를 대체할 NPU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NPU는 AI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딥러닝 알고리즘 연산에 최적화된 반도체다.

범용성은 다소 부족하지만 딥러닝 연산에 특화해 GPU보다 빠른 연산 작업이 가능하고 전력 소모를 줄여 전성비도 개선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생성형 AI 붐이 일면서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전력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배출 우려가 높다. 이 때문에 반도체업계에서는 GPU보다 전력 효율성이 좋으면서 특화 연산 능력을 갖춘 AI 칩 제조에 승부를 건다.

SK하이닉스는 SK텔레콤·SK스퀘어와 함께 지분을 보유한 AI 반도체 계열사 사피온으로 NPU 개발에 속도를 낸다. 사피온 지분은 SK텔레콤이 62.5%, SK하이닉스가 25%, SK스퀘어가 12.5%를 갖고 있다. 사피온은 2020년 11월 국내 첫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X220’을 내놨다. 지난해 11월에는 전작보다 4배 빨라진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X330’을 선보였다.

마이클 쉐바노우 사피온 최고기술책임자(CTO)는 “X330은 내부 분석 결과 동급 GPU보다 전력 효율이 1.3배에서 최대 1.9배 뛰어나다”며 “경쟁사 GPU를 X330으로 교체하면 소나무 1130만그루를 심는 탄소 저감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12월 네이버와 손잡고 1년 동안 개발한 AI 반도체를 공개했다. 삼성전자와 네이버는 공동 개발한 AI 반도체(NPU)를 활용하면 엔비디아 GPU와 같은 성능을 내면서도 전력효율은 8배 이상 높다고 자신했다.

[위기 요인] 칩 설계 역량 열위

이재용 회장 이사회 복귀 지연

생성형 AI 산업 팽창은 국내 반도체 산업에 ‘양날의 검’이다. 특히 AI가 산업 곳곳에 접목되면서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거나 1등 기업이 보유한 경쟁우위의 수명주기가 짧아지는 현상이 뚜렷하다. 지난해 10월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석학들도 이런 진단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 질서가 재편되는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과 맞닥뜨렸다면서 ‘링 밖의 챔피언’을 경계해야 한다는 우려를 표했다.

‘링 밖의 챔피언’은 삼성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리타 맥그래스 컬럼비아대 경영대 교수가 ‘경쟁우위의 종말(The End of Competitive Advantage)’이라는 책에서 편 주장이다. 요약하면 “과거에는 산업 간 경계가 명확했지만 이 경계가 무너진 오늘날에는 전통적 의미의 경쟁우위는 무의미하다. 오히려 같은 산업 영역에 있지 않은 기업이 가장 큰 경쟁자, 즉 ‘링 밖의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그래픽처리장치 GPU를 제조하던 엔비디아는 과거 삼성전자와 직접 경쟁 관계가 아니었지만 생성형 AI 팽창으로 산업 간 경계가 흐려지면서 경쟁 구도가 재편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AI 반도체 같은 고객 맞춤형 칩(Customized Chip)은 커스텀 비즈니스에 해당한다.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요구되는 혁신 역량과 서로 다르다는 점도 삼성과 SK하이닉스를 괴롭히는 대목이다. 메모리 시장은 표준화한 대량 생산 체제를 기반으로 집적도와 미세화 등 공정 혁신이 요구된다. 반면, 시스템 반도체나 팹리스, 파운드리는 반도체 밑그림을 설계하고 이를 고객 요구에 맞춰 양산 가능하도록 세부적인 공정 프로세스를 재규정하는 등 고도의 설계 역량이 요구된다.

배성주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고객 수요에 맞춰 개발 프로세스가 진행되므로, 이를 위해서는 고객 이해, 기술 마케팅, 개발과 생산의 연계 등 혁신 역량이 분산돼야 효과적인 대응 전략 수립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삼성의 경우 범용 D램 시장에서 오랜 기간 1위를 달려 ‘지위 불안(Status Anxiety)’에 크게 노출돼 AI 등 신산업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위 불안은 지위 이론을 연구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주장한 개념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조직은 가격 프리미엄 형성, 비용 절감 등 유무형 이익을 누리므로 실수나 결함 등이 외부로 노출돼 기존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도 ‘지위 불안’에 휩싸인 삼성의 전략적 경직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1등이 아닌 사업을 벌여서는 안 된다’ ‘삼성의 모든 사업부는 1등을 해야 한다’는 오늘날 삼성을 있게 한 경영 철학이 새로운 반도체 환경에서는 전략적 유연성을 떨어뜨린다는 진단이다. 가령, 기존 메모리 영역에서는 기존 지위를 고수하기 위해 지나치게 방어적인 전략을 펴는가 하면, 신사업에서도 1등을 의사 결정의 준거점(Reference Point)으로 삼다 보니 무리한 목표를 둘 때가 많다는 얘기다.

삼성전자 출신 IT 장비 회사 임원은 “기존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삼성의 강박이 결과지상주의로 변질되면서 새로운 영역에서 나타나는 실수나 오류를 조직의 핵심 자산으로 내재화하는 과정을 가로막고 있다”며 “오늘날 삼성을 만든 1등주의가 지금은 조직 전체에 부담을 주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파운드리만 봐도 애당초 TSMC처럼 최소 10년 이상 앞선 기업을 의사 결정의 준거점으로 삼다 보니 공정 단계와 수율이 자꾸만 엇박자를 낸다는 게 반도체 업계 시각이다.

삼성전자는 2018년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적용한 7㎚ 공정을 처음 시작했지만 5㎚, 4㎚ 공정 진입은 TSMC와 비슷한 시기에 진입했다. 선단 공정 진입 시기를 TSMC에 맞춰 마치 대등한 경쟁을 벌이듯 ‘1등 마케팅’을 펴다 보니 수율 안정화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이 빚어진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5㎚ 이하 파운드리 공정에서도 수율 안정화가 이뤄지지 못했는데 이를 훌쩍 건너뛰고 3㎚ 공정에서 TSMC를 앞지르겠다는 것은 기술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지위 불안’과 맞물려 여러 사업부를 둔 종합반도체 기업이라는 점도 삼성의 강점이자 약점으로 지목된다. 모든 사업부에서 1등 지위를 유지하는 데 사활을 걸지만 기업이 보유한 유무형의 자원은 한정적이다. 이 탓에 새로운 시장으로 자원의 분산과 재배치를 하는 데 유연성이 떨어질 수 있다. 과거 종합전자 회사의 여러 사업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은 설계와 제조의 수평 분업화라는 산업 변화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최근 반도체 산업 환경도 종합반도체 중심 IDM 모델에서 설계 역량에 방점을 둔 팹리스(Fabless) 또는 팹라이트(Fablite) 모델로 분화 추세가 뚜렷하다.

이재용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가 자꾸만 미뤄지는 점도 대형 인수합병(M&A)이 갈급한 삼성에는 악재다. 삼성전자는 오는 3월 20일 경기도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제55기 정기 주주총회를 연다. 이번 주총에는 사외이사 선임 안건과 재무제표 승인, 이사 보수한도 승인, 정관 일부 변경 등이 상정되지만 이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은 포함되지 않았다. 재계에선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사건 1심 무죄 선고로 이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 가능성을 점쳤지만 아직 항소심이 남은 점 등을 고려해 이사회 복귀를 미룬 것으로 본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9호 (2024.03.06~2024.03.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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