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는 데 24년 걸렸다, 두 남녀가 내린 선택
[장혜령 기자]
▲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
ⓒ CJ ENM |
인연이란 말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등등. 한 번 맺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은 학연, 지연, 혈연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호감이 느껴지는 상대를 향한 작업 멘트나, 애착 있는 사물에도 적용되기도 한다. 잠시였더라도 또 만나면 인연이라는 말을 꺼내고, 돈독한 사이로 발전하는 게 한국식 관계다.
특히 한국인 특유의 정(情)과 만나면 끈끈한 접착제가 된다. 호감이 생기면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길래'라는 말로 심화된다. 친분을 유지하고 싶을 때 주로 쓰이지만 한(恨)과 만나면 철천지원수 지간에도 통용되는 신비한 단어가 인연이다.
대체 한국인에게 인연은 무엇일까. 오랜 유교 문화가 만들어낸 끊을 수 없는 가치관일까. 여전히 21세기에도 인연이란 말이 통하는 걸 보면 신기하다.
전 세계를 돌며 다양한 첫사랑 사연을 들었다는 셀린 송 감독은 "독립적이고 개인주의가 강한 서양 문화권에서는 생소한 단어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인연'을 자주 생각하고 유용하게 쓰고 있다"며 말을 이었다. 음식만큼 강력한 콘텐츠의 전파력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인연을 설명할 때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발음하는 장면이 꽤 의미심장하다. 고유 명사가 된 '먹방', '재벌', '갑질' 같은 공용어 중 인연도 포함되겠다는 재미있는 상상도 해봤다.
▲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
ⓒ CJ ENM |
<패스트 라이브즈>는 제29회 선댄스 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첫 공개된 후 1년여 동안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마지막 관문인 제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주요 부분인 작품상,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 감독의 데뷔작에 75관왕 210개 부분 후보라는 타이틀이 달렸다.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디아스포라 이야기에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영화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면서도 내 이야기 같아 공감된다.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현실을 개척하는 태도가 낭만적이면서 현실적이다. 셀린 송 감독은 "누구나 두고 온 삶이 있기 때문"이라며 한국적인 소재지만 포괄적인 이야기라고 전했다.
이민, 이사, 전학, 이직 등으로 이별을 경험했다면 혹은 지역, 나라, 시간을 옮겨 다녀봤다면 이해하는 마법 같은 단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는 인생이란 큰 틀에 비유한 철학이다. 억겁의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태어난다는 불교의 윤회와 전생을 믿지 않아도, 삶을 반추해 보기 좋은 영화가 <패스트 라이브즈>다.
▲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
ⓒ CJ ENM |
어릴 적 한국에서 서로 좋아했던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은 12년 후 재회한다. 온라인으로 겨우 만나는 반쪽짜리 만남일지라도 뉴욕과 서울의 14시간 시차를 가뿐히 뛰어넘어 교감한다. 다른 시간과 장소가 늘 걸림돌이지만 이번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둘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다.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좁히지 못해 결별을 선택했고 각자의 인생을 살기로 했다. 바쁘게 살며 12년이 흐른 후, 해성은 문득 나영을 보러 뉴욕으로 날아간다.
과연 어떻게 변해있을까.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는 말은 잠시 아껴두고 옛날이야기만 주고받는다. 나영은 해성을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12년의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아서(존 마가로)와 결혼해 연극 작가로 성공했고 더 이상 슬프다고 울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12살의 나영을 소환하며 해성은 자꾸만 추억의 퍼즐을 맞추려고 한다. 그럴수록 나영은 불편해진다. 분명 존재했었지만 지금 뉴욕에는 없는 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는 데 24년이 걸린 둘은 이틀 동안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깔끔한 이별을 택한다. 다음 생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되어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 생은 인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별은 다시 만날 언젠가를 기약하는 세련된 방식이며 끝이 아닌 시작인 셈이다.
부부의 연을 맺으려면 8천 겁의 인연을 반복해야 한다고 한다. 둘은 현생이 아닌 그 어떤 타임라인, 멀티버스에서 부부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며, 만날 운명이라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어 있다. 그날이 오면 반갑게 인사하자.
'안녕!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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