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번 몰라본 이른 봄, 이제야 눈 여겨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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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상 기자]
봄은 결국 보게 될 스포일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결말을 알고 있어도 날씨는 언제든 각본 없는 드라마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예순 번을 맞닥뜨렸지만 봄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혼란스럽다. 살을 에는 추위에 신음 섞인 폭풍이 몰아치더니 어느 날엔 포근한 햇살이 비추고 밤엔 쓸쓸한 비가 내린다. 일주일 새에 봄과 겨울이 여러 번 번복되었다.
쉽게 허락하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다. 새로움엔 진통이 따르니까. 게다가 꽁꽁 얼어붙었던 계절이 아니었나. 그러기에 우리는 한 해의 네 철 가운데 봄을 가장 앞세우는 것일 테다. 때가 아직 이른 것이라 하면 그것도 맞다. 원래 경칩은 개구리의 봄, 사람의 봄은 춘분부터라니까.
어릴 적엔 동네 친구들과 놀기에 좋아서, 좀 더 커선 학교에 가야 할 때가 된 걸로 봄을 가늠했었다. 그 후론 두꺼운 외투를 벗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는 시기라거나 인사이동에 따라 새로운 만남이 있던 때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초봄은 그저 생활의 이정표였다. 이쪽과 저쪽에 다 걸쳐 있는.
계절로서의 느낌이 없던 것은 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주변은 눈길 끄는 풍경이랄 것이 없었고 사실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관심사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맛난 반찬만 쏙쏙 골라 먹듯 꽃 피고 화사하게 햇볕 내려 쬐는 이슥한 봄날만이 기억에 담겨있을 뿐이다.
▲ 목련의 털북숭이 겨울눈, 산수유, 매화 그리고 모종판 행렬 |
ⓒ 김은상 |
고집 센 겨울을 타이르듯 오늘은 마당에 노란 햇살이 차분히 내려앉았다. 손꼽 만큼이지만 매화와 산수유의 꽃봉오리가 터졌고, 목련나무 겨울눈은 금세 뭐라 말할 듯 오물거린다. 택배로 받은 분홍빛 모란과 작약을 화단에, 낙상홍 다섯 주를 화분에 심었다. 올 봄을 선명히 기억하려는 비표다.
초봄도 되기 전, 뜰을 선점한 녀석들은 따로 있다. 지칭개와 속속이풀, 뽀리뱅이. 냉이와 닮은 로제트 형태의 식물, 잡초다. 나물이라지만 먹어본 적이 없고, 독성이 염려스러워 섣불리 도전하기 어렵다. 아직은 쑥이나 머위처럼 아는 것들에 머문다. 시골 사람이 되는 것은 친숙한 나물의 가짓수가 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원생활엔 큰 변화가 드물다. 매일 비슷한 일상이다. 불안도 기대도 크지 않은 생활에 만족하며 소소한 것들에 관심을 두지만 언제부턴가 좀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직관적이고 더 인상 깊은 것. 바로 꽃이다. 변화를 느끼고 싶은 욕망의 투사체. 어쩌면 젊은 날이 다른 방식으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룸에 모종판을 줄 세웠다. 좋아하는 꽃과 채소를 좀 더 일찍 보고픈 마음이 담겼다. 종류에 따라선 모종으로 키워 옮겨 심는 것이 맨땅에 씨를 뿌리는 것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어떤 방식으로 식물을 키우는 것이 나은지 조금 더 알게 되었기에 하는 짓이다.
어쨌든 봄이다. 차양 위로 내리는 빗소리도 사르락 사르락 봄처녀가 치맛자락 끄는 소리 같다. 뜨락에서 조금씩 봄의 기척을 알아챈다. 아직 찬 기운이 알싸하지만 알리움, 히아신스 같은 알뿌리가 힘차게 움튼다. 생각지도 못한 싹을 발견하거나, 며칠 새 쑤욱 자라 있는 식물을 보면 순간 온몸에 작은 벼락이 내린다.
이른 봄은 기적을 잉태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모든 일이 기적인 것처럼' 살고자 한다면 이제 뜨락은 쉼 없이 그것을 보여줄 것이다. 불규칙한 것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여유만 있으면 된다. 다 잘 될 것이니 마음은 언제나 느긋하게. 설레는 세상은 거기에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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