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장자경영… 이제는 형제경영
계열사 영역 분리로 ‘불가침 조약’ 까지
취약한 지배구조 노린 외국자본 저지 분석
재계에 ‘형제경영’ 바람이 불고 있다. 과거 대기업 오너가(家)의 장남이나 남자 형제 중 한 명이 경영권을 독식하던 1인 지배구조 체제와 달리 최근 들어 형제들에게 경영권을 분배하는 것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바야흐로 형제경영 전성시대다. 1인 지배구조가 차기를 노리는 형제들 간 다툼의 씨앗이 돼 ‘형제의 난’을 낳았다면, 형제경영은 애초에 경영권 분쟁 소지를 끊어내고, 계열사 이합집산을 통해 “분야별, 영역별로 침범하지 말자”는 불가침 조약 역할까지 하는 모양새다. 일각에선 취약한 지배구조를 노린 외국계 자본의 침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6일 재계에 따르면 효성그룹은 최근 지주사인 ㈜효성 이사회를 개최해 ㈜효성신설지주(가칭)를 설립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오는 6월 임시 주주총회를 거치면 7월 1일 자로 신설 지주사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신설 지주사엔 효성첨단소재, 효성인포메이션시스템(HIS), 효성토요타, 효성USA 등 6개사가 포함되고 조현상 효성 부회장이 회사를 이끌게 된다.
기존 지주사인 ㈜효성과 효성티앤씨, 효성중공업 등 나머지 계열사는 조 부회장의 형인 조현준 회장이 그대로 가져간다. 지배구조를 둘로 나눠 형제경영을 본격화하는 셈이다. 지배구조 재편 이후에도 큰 틀에서 계열사들은 효성이라는 우산 아래 머물게 된다. 그러나 기존 지주와 신설 지주는 각각의 이사회를 새로 꾸려 별도의 회사처럼 움직인다. 이런 이유로 재계에선 두 형제의 독립경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지분 관계를 정리해 그룹이 쪼개지는 계열 분리를 염두에 둔 행보로 해석한다.
효성그룹도 이를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효성은 신규 지주사 설립 관련 보도자료를 통해 “지주사별 책임경영을 강화하고,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신속한 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지주사별 사업 분야와 관리 체계를 전문화하고 적재적소에 인적·물적 자원을 배분해 경영 효율화를 꾀할 방침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두 지주는 물론, 회장과 부회장이 서로의 영역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경영에 나서겠다는 얘기다.
국내 철강업계 3위인 동국제강은 지난해 지주사 체제로 변신하면서 형제경영을 강화했다. 동국제강은 지난해 10월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사인 동국홀딩스와 사업회사인 동국제강(열연사업), 동국씨엠(냉연사업) 등 3사로 새롭게 출범했다.
형인 장세주 회장과 동생인 장세욱 부회장이 지주사인 동국홀딩스를 이끌면서 보조를 맞추고 있다. 장 회장은 고(故) 장상태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2001년 대표이사 회장에 올라 2015년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가 지주사 출범과 함께 8년 만에 사내이사로 복귀했다.
한화그룹 역시 형제경영 밑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아직 김승연 회장이 건재하지만, 삼형제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사업 영역별 후계 구도를 짜놓는다는 구상이다. 장남 김동관 부회장이 한화솔루션 중심으로 항공·우주·방산·에너지 부문을 맡고 차남 김동원 사장은 한화생명 중심의 금융 계열사를 가져간다는 계획이다. 삼남 김동선 부사장은 호텔과 리조트, 유통에 집중하면서 최근엔 건설 부문으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삼형제가 한화그룹의 정점인 ㈜한화 지분을 늘릴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놓고도 여러 각도로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 형제경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주요 그룹 중엔 두산그룹과 LS그룹이 형제 또는 사촌경영의 전통을 일찌감치 이어오고 있다.
두산그룹은 형제경영을 근간으로 하다 2010년대 후반 사촌경영으로 변모했다. 두산그룹은 고 박승직 창업주의 손자인 고 박용곤 명예회장에 이어 1996년부터 2016년까지 박 명예회장의 동생인 박용오·박용성·박용현·박용만 전 회장이 3~9년씩 그룹 회장직을 수행했다. 2005년 박용오 회장에서 박용성 회장으로 리더십 교체기에 형제간 분쟁이 벌어지긴 했으나 형제경영 전통은 줄곧 지켜졌다.
이어 박용만 회장이 조카인 박정원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면서 사촌경영으로 이어졌다. 박정원 회장은 3세 중 장남인 박 명예회장의 첫째 아들이다. 박정원 회장은 동생인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과 그룹을 함께 이끌고 있다. 앞으로 기존 원칙대로 동생인 박지원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고 구인회 LG 창업주의 세 동생이 모여 2003년 출범한 LS그룹엔 사촌경영 전통이 있다. 구태회(넷째)·평회(다섯째)·두회(여섯째) 등 삼형제는 지주사인 ㈜LS 지분을 2:2:1 비율로 나누면서 사촌경영을 약속했고, 오너 2세들이 9년씩 회장직을 맡으면서 이를 잘 지켜나가고 있다. 고 구자홍 LS 초대 회장과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이 각각 9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했고, 2022년부턴 구자은 회장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구자은 회장 역시 9년간 회장으로 일하다 2031년쯤 물러날 전망이다.
SK그룹은 지난해 연말 인사를 통해 사촌·형제경영의 서막을 알렸다. SK디스커버리를 이끄는 최창원 부회장이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맡은 것이다. 최 의장은 최종건 SK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최태원 회장과는 사촌지간이다. 또 최 회장 친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도 이차전지 계열사인 SK온뿐 아니라 SK그룹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최 수석부회장은 앞으로 경영 보폭을 더 넓혀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 관계자는 “그룹이 커지고 분야별 전문성이 중요해지면서 계열별, 영역별로 형제들이 경영권을 나누고 있다”며 “자식 중 주로 장남이 그룹을 이끌던 관행에서 벗어나 형제, 자매들이 나눠 경영에 참여하는 게 효율성 측면에서도 좋다”고 전했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의 박주근 대표는 “2003년 SK 소버린 사태, 2015년 삼성 엘리엇 사태 등 외국계 자본의 공세를 지켜보면서 대기업 그룹이 안정적인 경영권 유지를 위해 형제·사촌경영을 공고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민영 기자 m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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