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보다 놀라웠던 '가여운 것들', 엠마 스톤이 완성한 대작
[김상목 기자]
▲ 영화 <가여운 것들> 포스터 이미지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공교롭게도 예전부터 유사하게 분류하던 2명의 '거장' 칭호가 붙기 시작한 감독 신작이 연속해서 국내 극장가에서 개봉을 맞이했다. 이 감독들은 예술성과 상업성을 겸비해 초반에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후, 당대의 스타 배우와 상당한 자원을 투입하는 대작을 연거푸 선보이는 중이다. 먼저 개봉한 감독은 <듄: 파트2>의 드니 빌뇌브, 1주일 간격으로 뒤를 이어 개봉한 감독은 <가여운 것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다.
드니 빌뇌브의 이름을 널리 알린 <그을린 사랑>과 란티모스에게 명성을 안긴 <킬링 디어>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지만, 필자에겐 찜찜한 구석이 하나둘씩 남던 작품들이었다. 빼어난 솜씨와 만듦새를 가진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해당 영화들에서 괜한 억측이면 좋으련만 뭔가 위악적이고 과시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영화 속 상황 설정을 세련되게 연출하는 것으로 작가의 예술성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일말의 의심이었다. 분명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우리가 외면할 뿐, 실제 일어나는 믿기 힘든 비극을 굳이 재연해 보여주는 것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또는 고대의 신화 구조를 차용해 가면서 영화 속 인물들에게 과도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행히 '큰 물'에서 작업하게 된 이 감독들의 예술적 고집은 약간씩 유연해졌고, 그들에게 부여된, 한 단계 상향된 제작환경과 안정된 원작 각색 및 각본가의 존재는 필자에겐 이점으로 다가왔다. 드니 빌뇌브가 계속 선보이고 있는 별도 원작의 영화화, 그리고 란티모스의 초중반 작업이 머물던 폐쇄된 영화 속 공간의 경계를 벗어나 확장된 세계관과 서사를 선보이는 근작들은 상업화라기보다는 도전과 모색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듄> 연작도 충분히 기대한 만큼 만족스러웠지만, 전자와 비교해볼 때 조금 덜 관심을 품고 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은 감독에 대한 재평가를 고민해야 할 만큼 놀라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이러는 걸까 궁금한 분들은 계속 스크롤을 내려보시길 권한다.
▲ 영화 <가여운 것들> 스틸 이미지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마치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받은 피조물처럼 일그러진 흉터로 뒤덮인 괴짜 의학자 '갓'윈 백스터 박사의 해부학 교실, 어떤 학생들은 박사를 괴짜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하지만 맥스는 그런 박사의 충실한 제자로 학문에 정진하려 한다. 재능은 많이 부족하지만 배우려는 자세가 좋다며 백스터 박사는 맥스에게 자신의 연구를 도와줄 것을 청한다. 요청을 수락한 맥스는 박사의 저택에 출입하며 박사의 실험체인 젊은 여성 '벨라'를 만난다. 그의 일상을 기록하는 게 박사가 맥스에게 요구하는 과업이다. 성실하게 맥스는 존경하는 박사의 연구에 조력한다.
그런데 맥스는 기록 대상인 벨라가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저택에는 박사와 나이든 조수 겸 가정부만이 위치한다. 그들은 벨라를 잘 돌보지만 한사코 외부인 및 바깥세상과 접촉을 차단한다. 벨라 역시 성숙한 여성의 외양과 달리 부자연스러운 언행이 두드러진다. 상류사회는 물론 중산층 가정까지 예의범절 에티켓이 강조되던 당시 분위기에서 벨라는 전혀 가정교육은 물론 제도권 교육을 받은 것 같지도 않은 존재다. 좋게 말하자면 천진난만하지만 매일 벨라를 상대하던 맥스는 이내 벨라에게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이는 확신으로 변한다. 벨라는 성인의 육체를 그것도 아주 빼어난 수준으로 갖췄지만 언행은 유아기 수준이다. 선악 구분도, 규범 준수도 안중에 없다. 맥스가 판단하기에 이는 벨라의 심성이 악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예 '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본 맥스는 은사에게 진실을 밝히라며 언성을 올린다.
백스터 박사는 순순히 맥스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투신자살한 여성이 금방 숨이 멎은 시신을 입수한 백스터 박사는 생명 소생, 즉 '부활'을 시도하려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시체는 만삭의 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괴팍한 실험을 거듭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전형처럼 보이던 박사는 당대 합리주의의 화신처럼 이미 자신의 의지로 목숨을 끊으려 한 이름모를 실험체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결정한다. 그를 부활시키는 건 도리에 맞지 않다는 판단이다. 그렇다면 실험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박사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산모의 태내에서 죽음을 맞게 된 태아에 주목한다. 그렇게 엄마의 육체에 태아의 영혼이 깃든 피조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 곡절을 가진 벨라는 어른의 몸을 한 갓난아이지만 백스터 박사의 체계적 보살핌과 교육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단어를 15개씩 익히고 밥상머리 교육도 연일 이어진다. 하지만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벨라를 백스터 저택의 구성원들은 가로막고, 벨라의 히스테리는 심해져 간다. 이쯤에서 박사는 기묘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벨라를 관찰하고 부대끼며 이 천진한 상대에게 매혹된 맥스가 저택에서 함께 사는 조건으로 벨라와 결혼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법적 절차를 처리하기 위한 서류 작성 차 방문한 바람둥이 한량 변호사 '던컨'은 벨라를 데리고 외국으로 도피행각을 벌인다. 이를 막으려던 일행은 하지만 백스터 박사의 결단으로 벨라의 탈출을 방조한다. 이제 순진무구한 영혼과 불가사의한 매력을 겸비한 존재가 울타리를 벗어나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 영화 <가여운 것들> 스틸 이미지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첫 번째 정류장: 포르투갈 리스본>
던컨과 함께 떠난 벨라는 중세 시절부터 영국과 우호 관계가 돈독했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한다. 처음 만나는 외국 풍경에 순간순간이 신기한 벨라다. 남부럽지 않게 여유로운 여행길에서 호텔에 여장을 푼 둘은 벨라가 '뜨거운 뜀박질'이라 표현하는 성행위에 탐닉한다. 육체의 쾌락을 얻는 법을 알게 된 벨라는 난봉꾼 한량인 던컨도 감당이 안 될 만큼 열정적으로 '뜨거운 뜀박질'에 몰두하다 상대가 지친 틈을 타 바깥으로 단독 외출을 감행한다. 리스본의 명물 에그타르트를 맛보고, 전통음악 '파두'에 귀를 기울이지만 이 항구도시는 거칠고 폭력적인 분위기 또한 지니고 있기에 벨라는 충격을 받는다.
벨라는 거리낌 없이 호텔의 상류층 손님들과 어울리며 자신이 한창 즐기는 성행위 표현을 가감없이 명사들과 합석한 테이블에서 드러낸다. 던컨은 벨라를 단속하려 골몰하지만 그가 벨라를 제어하는 건 불가능하다. 난처해하면서도 벨라에게 집착하고 그를 (백스터 박사처럼) 통제하려던 던컨은 어느새 둘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어 감을 깨닫는다. 처음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미모의 여성을 꾀여 즐기려던 것이 이제는 사고뭉치 시한폭탄 같은 상대를 뒤치다꺼리하는 건 물론, 생동감으로 넘치는 벨라에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만 것이다.
<두 번째 정류장: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리스본에서 성적 욕망을 분출하던 벨라와 던컨은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여객선에 승선한다. 여전히 둘은 엽색 행각에 몰두하지만 배 안에서 만나 사귄 교양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벨라는 이제 다음 단계로 들어서려 한다. 세상의 잔혹함에 경악하면서도 지식과 학문을 익히는 벨라는 순식간에 학구열에 빠진다. 이제 던컨과의 성행위 결정권은 벨라에게 확고하게 이전된 셈이다. 벨라는 섹스보다 독서가 더 즐겁고, 새로 알게 된 친구들과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에 대해 토론하고 의문을 풀어간다. 벨라의 관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던컨은 선상 카지노에 탐닉하며 질투와 짜증을 종종 일으킨다.
교양이 넘치지만,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해리'와 함께 당시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집트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벨라는 그곳에서 목격한 빈곤과 비참에 평범한 이들은 비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한다. 해리가 아무리 만류해도 벨라는 기아에 허덕이는 항구 주변 빈민들을 도우러 나선다. 물론 그의 즉자적 선의는 실상 별 도움이 될 리 없지만 벨라는 과감하게 가진 것을 몽땅 내어놓는다. 그 결과 던컨과 여유롭던 여행은 탕진각을 맞고, 둘은 빈털터리가 되어 파리에 도착한다. 망연자실한 던컨과 담담하게 새로운 공간을 맞이하는 벨라의 표정이 대조를 이룬다.
<세 번째 정류장: 프랑스 파리>
마침내 숙소도 구하지 못해 노숙 신세가 된 둘은 결별한다. 던컨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 결혼하자고 애원하지만 이제 그가 지겨워진 벨라는 혼자서 파리에서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려 한다. 유흥업소에서 매춘부로 일하게 되지만 사회주의자 친구도 사귀게 되고, 이것저것 세상을 배워나가며 벨라는 우울하거나 위축될 틈이 없다. 유럽의 문화수도 파리에서 벨라가 견문을 익힐 곳은 사방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체험을 쌓아나가며 이제 조금 괴짜이지만 인기 있는 업소의 주역이 된 벨라는 여전히 자신에게 집착하는 던컨을 거절하며 사회화되는 중이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된 백스터 박사는 벨라를 수소문하고, 어렵게 연락이 닿게 된 벨라는 오랜만에 자신이 갇혀 있던 박사의 저택으로 돌아온다.
<네 번째 정류장: 영국 런던>
돌아온 저택에서 벨라는 자신에게 감춰진 비밀을 알게 된다. 이제 벨라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 영화 <가여운 것들> 스틸 이미지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그렇게 당대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을 종횡하는 벨라의 모험과 성장 과정은 인상적인 감독의 연출과 제작진의 열과 성을 다한 기교 덕분에 화면 속에서 근사하게 구현된다. 정교하게 구성된 <가여운 것들>의 평행세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이전의 소규모 작업들을 통해 선보였던 폐쇄된 제한적 공간을 초과해 판타지 로드무비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풍경을 선보이면서도 싸구려 티와는 까마득하게 거리가 먼 거대한 이미지를 펼쳐 보인다.
백스터 박사가 새롭게 탄생시킨 순수한 피조물 벨라는 박사의 저택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지만, 결국은 실험체에 불과한 존재다. 일상이 통제되고 감시 당하는 벨라의 처지는 (감독의 장기이기도 한) 마치 폐쇄 감옥의 간수가 된 것처럼 열쇠 구멍 혹은 감시창으로 관객이 관찰하는 것처럼 굴절된 각도의 카메라 렌즈로 표현된다. 게다가 박사의 저택에서 실험체로 머물고 있는 시간 분량은 흑백으로 처리되어 답답하고 단조로운 상황=자유로운 영혼인 벨라가 감금된 실정을 극적으로 구현해낸다.
하지만 박사의 저택에서 갇혀 지내던 시간 외의 장면은 현란한 원색 바탕의 마치 애니메이션과 실사 조합처럼 환상적인 풍경으로 그려진다. 영화 초반에 실험체로 관찰되던 저택 내부 분량만 빼면 <가여운 것들>의 색감은 판타지 동화에서 목격되는 이미지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여기에 답답한 저택을 벗어나 너른 세계의 다양한 단면을 겪게 되는 벨라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그 낯선 광대무변함을 강조하기 위해 풀사이즈 전체화면을 기막히게 잘 활용하기에 그 자체로 주인공의 심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기능까지 구현해버린다.
여기에다 기괴한 느낌을 가득 전달하던 흑백의 저택 풍경에 배경음악으로 조성되는 사운드는 묘하게 신경을 긁어대는 일그러진 불협화음 음조로 표현되는데, 전작들에서 물려받은 감독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다. 마침내 자기 의지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벨라의 결정적 순간들에선 주인공의 심경을 표상하는 격렬함이 강조되는 멜로디가, 마침내 맞이하게 된 세상의 경이는 장대한 환희의 교향곡으로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의 귓가에 흐른다.
또한 벨라가 경험하는 유럽과 지중해 세계의 풍경은 구체적으로 시간대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19세기 중후반 식민지 제국주의와 산업혁명, 과학기술 발달 등으로 체현된 어떤 상징적 풍광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물론 리얼리즘을 강조하기보다는 마치 스팀 펑크 평행세계를 보는 질감이긴 하지만 당대에 구사되던 물질문명과 일상생활문화가 정밀하게 묘사되기에, '벨에포크' 혹은 '빅토리아' 시대의 (판타지 이미지를 살짝 얹은) 시각적 체험을 즐기기에도 무리가 없는 세밀함을 선보인다.
▲ 영화 <가여운 것들> 스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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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단순한 말초적 고어 장면과는 궤를 달리 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그로테스크'한 악취미는 이 영화 곳곳에 비밀장치로 숨겨져 있다. 특히 영화 초반에 집중되는 백스터 박사의 마치 숨은 요새처럼 벨라를 창조하고 구속해놓은 은밀한 공간 속 이미지가 감독의 인장처럼 배치된다. 천재와 광인의 경계처럼 묘사된 백스터 박사의 실험 과정에서 인체 실험 이전 시도된 실험동물들의 등장은 몇몇 관객에겐 슬래셔 고어 영화보다 더 찝찝하게 뇌리에 남을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몇몇 고어한 장면과, 벨라의 정신적 해방과 성장 과정에서 주요한 키워드로 구사되는 성적 행위 묘사가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선정적/말초적 이미지로 관객의 시선을 포획하려는 악의로 비춰지진 않는다. 물론 벨라가 파리에서 경험하는 윤락업소에서의 시간이 거북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과정조차 당대의 순종적 여성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벨라의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개연성 측면에서 궤도를 이탈하진 않는다. 오히려 과거 '성해방' 혹은 '성노동' 담론의 초벌 형태를 개론적으로 풀어내는 기능을 선보이는 셈이다. 물론 서구의 중년 백인남성 감독이 해당 지점들을 결국 남성의 시각으로 일정 부분 탐미적으로 풀어냈다는 지적은 보는 시각에 따라 충분히 나올 법하다.
하지만 결국 <가여운 것들>은 1815년, 18살 나이에 마리 셀리가 구상했던 <프랑켄슈타인>의 대안적 재구성에 충실한 이야기다.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고전 과학소설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시인하며 따른다. 얼핏 야만적이기 그지없지만, 전근대적 관습과 미신을 타파하고 근대적 합리주의와 과학 문명을 신뢰하는 백스터 박사의 행보는 초기 전지 모델, 우리가 학창시절에 한 번쯤 접해봤을 갈바니 전지 실험에서 개구리 뒷다리가 전극에 의해 움직이던 체험에서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부활을 착안했던 마리 셀리의 발상과 정확히 잇닿아 있다. 그래서 영화 속 시대 배경이 소설 원작의 내용 기반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기도 하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종교의 권위가 부정되고,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당대 지식인들의 경향을 온전히 구현한 존재였다. 그는 신의 영역에 도전해 시체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지만, (좀비와 달리) 지적 능력과 이성이 있는데도 그의 창조물은 흉악한 외모 때문에 박해 당하고 그에 대한 반항과 우연한 사고가 겹쳐 빅터의 주변 지인과 가족, 사랑하는 아내까지 해치며 철천지원수가 되고 만다. 그 결과는 양자 모두의 파멸이다. 하지만 둘은 중간에 타협할 기회가 있었다. 괴물로 매도되던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피조물은 '신부'를 자기를 창조한 것처럼 만들어 준다면 멀리 떠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미 자신의 업적을 의심하게 된 프랑켄슈타인은 약속을 뒤엎고 절망한 상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하지만 <가여운 것들>은 '만약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좀 더 자신의 피조물에 애정을 갖고 부모의 자세로 대했더라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라는 '만약에 IF' 가정에 관한 답변을 도모하는 기획처럼 완성된다. 그리고 성 역할을 반전시키는 것만으로 흥미로운 변주는 물론, 동시대에 발화한 성평등 운동 담론과 연동되는 효능을 추가하기에 이른다. 거기에 벨라가 부활하기 전,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통해 제기되는 제국주의 폭력에 대한 은유와 여전히 가부장제 권위에 억압되던 당대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하나로 모여 대안적 시대정신을 모색하는 데 일정 부분 도달하고야 만다. 어느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작고 극단적인 설정에만 의지하지 않고도 흥미로운 상상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서사극을 지탱할 수 있다는 발견의 기회인 셈이다.
▲ 영화 <가여운 것들> 스틸 이미지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이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원작은 스코틀랜드 작가 고 앨러스데어 그레이(1934-2019)의 장편소설 <가여운 것들>이다(2023년 영화화와 연계해 국내엔 황금가지 출판사가 번역 출간한 상태다). 500쪽 가까운 국내 번역본의 설정과 목차를 보면, 원작 자체가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서사에 헌사와 변주를 전제했다는 것을 파악 가능하다. 영화에서 벨라를 관찰하며 뒤엉키게 되는 백스터 박사의 조수 '맥스'가 19세기 당대에 작성한 기록과, 그의 아내 '빅토리아'가 쓴 편지 내용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현대에 우연히 발견한 화자가 추적하는 구성을 충실히 따라간다.
소설에서 벨라의 여행 경로는 영화화 과정에서 일정하게 압축되는 방식으로 각색되었다. 하지만 주요 경유지마다 벨라의 인생 경험치가 단계별로 진화하는 건 동일한 형태다. 큰 틀에서 원작의 흥미로운 구석을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감독의 이전 작업에서 즐겨 구사하던 코드와 장치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게 들어차 있다. 지도를 펼쳐놓고 벨라의 모험을 당대 문명사와 정치사회적 지형을 함께 떠올리며 따라간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안락의자 여행기가 될 테다. 그런 장대한 모험담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주인공의 변화를 소화한다면 제목의 '가여운 것들'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깨달음은 덤으로 얻을 수 있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감독을 믿고 쉽게 도전하기 망설여질 연기에 도전한 주요 배우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해당 배우 상당수가 감독의 후속작 여러 편에 함께 하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전한다). 중후함과 도전정신을 겸비한 윌렘 데포가 '갓'윈 백스터 박사 역할로 이 영화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 몫을 탁월하게 소화하는데, 감독은 과학자 vs. 피조물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시도를 선보여 더 캐릭터의 깊이를 끌어올린다. 백스터 박사는 벨라에게 '갓', 신으로 호칭되는 절대적 존재이지만 본인은 정작 탁월한 의학지식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폄하되는 존재다. 게다가 본인보다 더하면 더할 것 같은 부친에 의해 생체실험 수준의 모진 학대를 당해 벨라보다 외모상으론 더 '프랑켄슈타인' 괴물에 가까운 형상이다. 백스터 박사와 벨라 간의 교감과 모순이 어떤 결말로 나아가는지 관객은 영화 내내 숨 죽인 채 상상할 법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2시간 20분이 넘는 <가여운 것들> 속 모험을 통해 '속을 알 수 없는 괴물'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벨라 역할을 감당한 엠마 스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대 배우들 중 독보적인 경력을 쌓아나가는 중이지만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 몇 개 트로피 쌓아올리지 못한다면 심사단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보기 드문 경이로운 캐릭터 변화를 극중에서 선보인다. 누가 갓난아이의 뇌를 가진 성인여성의 엉거주춤하고 돌발적인 존재에서 교양과 지성, 그리고 주체적 의지를 겸비한 완전체로 '진화'하는 과정을 표정과 동작, 눈빛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다른 대안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작품정보> |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4│영국│로맨스/멜로/SF 2024.03.06. 개봉│141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주연 엠마 스톤(벨라 백스터 역), 마크 러팔로(던컨 웨더번 역), 윌렘 대포('갓'윈 백스터 박사 역), 라마 유세프(맥스 맥캔들리스 역), 제러드 카마이클(해리 애슬리 역), 크리스토퍼 애벗(오브리 폴 블레싱턴 경 역) 출연 마가렛 퀄리(펠리시티 역), 캐서린 헌터(스위니 역), 수지 벰바(투아넷 역) 각본 토니 맥나마라 원작 앨러스데어 그레이 {가여운 것들} 수입/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2023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2023 14회 애들레이드국제영화제 장편 픽션 관객상 2023 95회 미국비평가협회상 10대 영화상, 남우조연상(마크 러팔로), 각색상(토니 맥나마라) 2023 미국영화연구소상 올해의 10대 영화상 2024 81회 골든글로브시상식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 여우주연상(엠마 스톤) 2024 29회 크리틱스초이스시상식 여우주연상(엠마 스톤) 2024 68회 영국촬영조합상 촬영상(로비 라이언) 2024 44회 런던비평가협회 영화상 올해의 여우상(엠마 스톤) 2024 28회 미국미술조합상 판타지 장편영화상 2024 77회 영국아카데미영화상 여우주연상(엠마 스톤), 의상상(홀리 와딩턴), 미술상(제임스 프라이스, 쇼나 히스, 즈자 미할렉), 시각효과상(사이먼 휴즈), 분장상(나디아 스테이시, 마크 쿨리어, 조쉬 웨스턴) 2024 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색상, 촬영상, 미술상, 편집상, 의상상, 분장상, 음악상(총 11개 부문 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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