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빠진 '007 시리즈', 비판받던 제작진이 불러온 반전

김성호 2024. 3. 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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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658] < 007 카지노 로얄 >

[김성호 기자]

모든 것엔 주어진 수명이 있다. 천년제국을 꿈꾼 수많은 나라도 마침내는 쇠락하여 멸망하고, 수백 년 묵은 고목도 마침내 꺾이어 쓰러진다. 콘텐츠도 다르지 않아서 오래도록 이어온 시리즈며 캐릭터도 제게 주어진 수명을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새 처음의 참신함을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식상하고 고루한 무엇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무력하게 나이들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낡아 자리에서 물러나는 대신 다시금 푸르름을 되찾는 것이 드물게는 있는 것이다. 새로 시작한다는 뜻에서 소위 '리부트'라 불리는 작품들이 그를 의도한 것으로, 때때로 리부트에 성공해 낡은 틀을 벗고 새로움을 입는 경우가 발견되곤 한다.

일찍이 팀 버튼의 것으로만 기억되던 <배트맨> 시리즈가 어느덧 DC코믹스 히어로물을 지탱하는 새로운 시리즈로 거듭난 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해도 좋겠다. 그러나 옛 것을 새로 하는 것은 개혁이란 말 그대로 피부를 벗겨내고 새 피부를 입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많은 작품이 새로 거듭나는 데 실패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일 테다.
 
▲ 007 카지노 로얄 포스터
ⓒ 소니픽처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첩보물

< 007 > 시리즈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첩보물이다. 액션이나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 함몰되지 않고 나름의 경계를 이루어 제 장르를 개척한 첩보물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시리즈라 해도 좋다. 그 역사 또한 무척이나 길어서 첫 영화 < 007 살인번호 >가 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반세기도 훌쩍 더 지난 1962년이다. 기자 출신 작가 이언 플레밍이 12편에 걸쳐 낸 소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그 원작을 이룬다.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 007 > 시리즈는 첩보물 인기의 중추를 이뤘다 해도 틀리지 않다. 전후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체제경쟁 가운데서 전면전보다는 각국 정보요원 및 간첩들의 활동이 중요해진 영향이 없지 않을 테다. 특히 미국 CIA가 중미와 남미,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벌인 여러 작전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며 첩보영화에 대한 관심 또한 갈수록 늘어나게 됐다. 이로부터 CIA와 구소련의 KGB, 이스라엘의 모사드, 영국의 MI6까지를 소위 4대 첩보기관이라 하여 영화에 자주 등장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려 20편에 이르는 시리즈가 참신함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숀 코너리와 데이비드 니븐,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에 이르는 제임스 본드 역 배우의 변화 또한 시리즈가 낡아가는 흐름을 막아내지 못했다. 특히 제작진은 색이 발해가며 위기감이 두드러질수록 전과 다른 색깔을 내는 대신 과거 전성기를 복원할 수 있는 새 피를 수혈하는 데 급급하는 선택을 했다. 늙어가는 배우를 조금 어린 배우로 대체하는 것뿐, 변화하는 시대상과 취향을 맞춰내는 선택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리즈 존폐의 위기에서
 
▲ 007 카지노 로얄 스틸컷
ⓒ 소니픽처스
 
그렇게 맞이한 21세기, 시리즈는 더없이 큰 위기와 마주한다. 어느덧 세상엔 냉전이 종식되고 자유주의가 도래한 지 오래가 됐다. 지역전쟁이 거듭하여 발발하고 국가단위가 아닌 곳에서도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굳이 첩보물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때가 아니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반세기 동안이나 이어져온 시리즈가 관객에게 식상함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제작진은 전대 제임스 본드로 우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피어스 브로스넌으로는 위기를 탈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렇게 7대 제임스 본드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시리즈 21번째 작품, < 007 카지노 로얄 >은 제작진이 봉착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대로 드러낸다. 우선 제임스 본드부터 당대 액션스타로 막 발돋움한 다니엘 크레이그를 발탁해 교체했다. 숀 코네리부터 이어져 온 우아하고 세련된 요원의 이미지와 완전히 상반되는 배우를 차세대 본드로 선택한 것이다. 전장의 밑바닥을 휩쓸고 다니는 이미지의 크레이그는 독보적인 매력과 두뇌에 더해 신기술을 무기 삼던 과거의 캐릭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였다. 그러나 제작진의 선택은 바로 그였다.

시리즈가 지켜온 정체성이 단박에 무너진다는 비판이 나올 밖에 없었다. 크레이그는 본드 보다는 2002년 등장해 < 007 >의 아성을 허문 <본> 시리즈와 더욱 어울리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뛰고 구르며 팔다리가 마주치는 액션연기에 익숙한 배우를 기용했기에 시리즈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은 자명했다. 그렇다면 사라지는 건 과거의 캐릭터이지 않겠는가.

정체성의 붕괴, 처음으로 돌아가라
 
▲ 007 카지노 로얄 스틸컷
ⓒ 소니픽처스
 
정체성의 붕괴는 오래 이어져온 시리즈에겐 치명적인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맞추기 위해 정체성을 버린다면 관객이 굳이 오래된 시리즈를 선택할 이유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리즈는 정체성을 챙겨야 했고, 그 선택의 결과가 바로 <카지노 로얄>인 것이다. 이 작품은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첫 작품이다. 세밀하고 체계적인 설정에서 아쉬움이 따르지만 이를 전격 채택하여 새로 시리즈를 쓰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고 하겠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성공이었다. 시리즈는 이후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 <스펙터> <노 타임 투 다이>까지 모두 다섯 편이 나왔다. 여섯 번째 시리즈의 연출을 두고 역대급 감독을 선택해 또 한 번의 도약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풍문에 전해질 만큼 승승장구하고 있다. 불과 십여 년 전 시리즈의 문을 닫을까 걱정하던 것과는 천양지차의 모양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섯 편째 출연을 하게 되면 과거 로저 무어에 이어 연달아 여섯 편의 영화에 주연한 두 번째 본드가 된다. 누구도 그가 거기서 멈출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 속 MI6에선 작전 중 민간인을 죽여도 면책되는 신분, 통상 살인면허라 부르는 자격을 가진 이의 암호명 앞에 '00'을 붙인다. 본드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임무를 연달아 성공하며 007이 된다. 즉, 영화는 과거 시리즈의 이전으로 돌아간 것으로 본드의 탄생을 그린다. 말하자면 '제임스 본드 비기닝'이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오늘의 007이 만들어졌다
 
▲ 007 카지노 로얄 스틸컷
ⓒ 소니픽처스
 
본드는 테러리스트 조직을 뒤쫓는 과정에서 자금줄인 르 쉬프르(매즈 미켈슨 분)이 제 카지노 고객들의 돈으로 공매도 투자를 잘못 하였다가 큰 피해를 본 사실을 알아낸다. 그는 르 쉬프르가 몬테네그로에 위치한 카지노 '카지노 로얄'에서 우승자가 1억 5000만 달러(약 2000억 원)를 따는 포커대회를 열고 자금을 마련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상부의 허가를 얻어 그 현장에 잠입한다. 현장엔 판돈 1500만 달러(약 200억 원)를 댄 영국 재무부 공무원 베스퍼 그린(에바 그린 분)이 그와 동행한다.

영화는 그로부터 본드가 포커게임을 통해 우승자가 되는 과정, 다시 그 판돈을 둘러싼 음모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 과정은 이전의 첩보물처럼 화려하거나 잘 짜여 있지는 않지만 본드와 본드걸의 매력을 돋보이게 그려낸다. 이는 <카지노 로얄>이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로 남기보다는 새로운 시리즈와 캐릭터의 출발을 수월케 하기 위한 징검다리로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카지노 로얄>은 그를 더없이 훌륭히 해낸다.

<카지노 로얄>은 영화 속 총 상금으로 책정된 1억 5000만 달러를 제작비로 썼다. 모두가 첩보물 전성시대는 끝났다며 손익분기만 넘기면 다행이라 우려하던 그때, 영화는 5억 9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성공을 거뒀다. 모두가 보통의 각오로는 내릴 수 없는 선택 덕분이었다. 그럼에 오늘의 < 007 >이 있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작품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카지노 로얄>이 가장 유력한 답일 밖에 없을 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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