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교회로 가는 길⑨] 희망의 전제조건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미국 원주민 크로우 부족의 위대한 추장 플렌티 쿠즈(Plenty Coups)의 말입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강압 때문에 더는 그들의 삶의 방식대로 살지 못하고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들어가 산 지 30년이 지난 뒤 이처럼 슬픈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슬픈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 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후변화로 인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그 당혹감. 이해 못 하는 삶을 살 때 인생은 무의미해집니다.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기후변화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짐 안탈 목사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까.”(기후교회, 287쪽) 사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압도하는 뭔가에 대해 자세히 알고 나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서는 법입니다. 가령 정치 세계의 추잡함을 알고 나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들려오는 정치판의 추잡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혀를 쯧쯧 차기만 할 뿐, 어떤 희망을 품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냥 정치에 관해서 관심을 끄는 일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후변화 문제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관심을 가져봤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죠.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까.”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 목사가 제시하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희망에 찬 삶을 살아가기’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선 그는 낙관주의와 희망을 구분합니다. 낙관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태가 호전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낙관주의의 문제는 그저 그러한 기대를 할 뿐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낙관주의는 비용이나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 그저 마음의 태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낙관주의를 넘어서 희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무엇일까요.
희망의 전제조건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짐 안탈은 말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성경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면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회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대개 회개하지 않는 자는 현실을 외면합니다.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니까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죠.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두려움과 우울함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 밀려오는 두려움과 우울함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두려움과 우울함을 넘어서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전제조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표시하기’ 입니다. “슬픔의 연기와 사랑의 불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생명을 사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자연 세계에서의 기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기후변화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슬플 것이다.”(기후교회, 290쪽)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면하게 됐을 때, 우리의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명의 파괴’입니다.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Science Advances)’가 최근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100년까지 생물 다양성이 25% 감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슈퍼컴퓨터가 시뮬레이션을 통해 얻어낸 결과입니다. 탄소 배출량이 줄어들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아이들은 잠자리나 코끼리 코알라 같은 곤충과 동물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슬픈 현실 속에서 희망을 품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슬픔을 표현하기’ 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지혜입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현실, 슬픔, 희망: 세 가지 긴급한 예언자적 과제들』에서 성경의 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서에 흐르는 감정은 ‘슬픔’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서에는 망국의 슬픔이 깊이 베어져 있습니다. 왜 예언자들은 그렇게 슬픔을 표현했을까요. 월터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로 표현 못 할 슬픔의 상태에서 예언자의 과제는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공공의 슬픔’을 장려하고 허락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장차 다가올 파괴를 예상한 예언자들은 폭력에 대한 대안으로 건강하고 새롭고 대안적인 삶, 즉 슬픔을 공유하고 밖으로 드러내고 정직하게 인정할 것을 권한다. 슬픔은 상실감을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로 전환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끌어안고 편히 쉬도록,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진혼곡(requiem)을 드리는 것과 같다.”(기후교회, 292쪽)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공공의 슬픔’을 장려했다는 것과 그러한 슬픔의 표현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변화의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그 현실이 가져올 슬픔에 대해 공적으로 슬퍼하도록 장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슬픔의 공공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누구에게나 공유되는 슬픔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는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공유될 때, 우리는 한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 한마음으로 모두가 기후변화를 위한 행동을 실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전제조건입니다. 희망은 낙관주의와 달리 행동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직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존재(하나님)와 연결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 11:1,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면한 기독교 신앙의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지금껏 그랬던 대로 변함없이 말입니다.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로 인한 슬픔을 공적으로 표현할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희망이시니 기후변화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은 전혀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기후변화의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유산은 사도행전 2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이런 풍경을 일시적인 현상이나 광기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이룰 수 있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현대의 예레미야’로 불리는 환경운동가 빌 맥키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이기를 멈추는 것이다.”(기후교회, 307쪽) 상품을 많이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을 최선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는 개인주의를 부추깁니다. 우리는 여기에 너무 길들어 있어서 ‘개인이기를 멈추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뿐더러 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생명이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는 개인이기를 멈추고 좀 더 많은 자비와 관대, 돌봄과 웃음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구원(꿈)을 이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의 현실 앞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두려움과 우울함을 넘어 희망을 말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함께 기후변화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 현실을 똑바로 마주합시다. 그리고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생명의 파괴에 대해 공적인 슬픔을 표현하고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이야기하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되는 삶’을 살아갑시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장준식 목사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교회다”라고 고백하며, 교회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살아온 ‘교회 오빠’ 출신, 삼대째 감리교 목사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공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여전히 교회는 우리 시대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희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리 사회를 위하여 무슨 사역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조직신학을 전공했고, 문학과 사회학, 현대철학 등 인문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며 글쓰기를 한다. 연세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 그리고 GTU(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PhD)에서 공부했으며, 한국문단에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현재,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세화교회 담임목사이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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