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칩워 이기려면 전두환이라도 소환해야 하나
이승만 재평가 활발하듯
위기에 놓인 K반도체 산업
구출할 40여 년 전 전략 절실
5·18 학살 주범도 경제발전
매진했듯 경제안보 지켜내야
건국 대통령 이승만 재평가가 한창이다. 영화 ‘건국 전쟁’은 국부로 모실 기세로 선봉에 섰다. 영화는 ‘친일파 중용’ ‘분단의 원흉’ ‘독재자’ 등 부정적 평가 대신 한미동맹 체결 등 업적을 부각한다. 우파뿐 아니라 중도성향 관객들도 관람 대열에 동참하는 걸 보면 팬덤 대결로 갈라진 작금의 정치 현실을 자각하고 자유 대한민국의 토대를 쌓은 이승만을 역사 속에서 소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팬덤 정치 폐해 못잖게 한국은 대만, 일본, 미국의 공세로 반도체라는 경제안보의 둑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처럼 소환이 불가피한 이가 전두환 대통령이다. 그에겐 5·18 학살 주범이라는 혐오의 꼬리표도 있지만, 재임 시 K반도체를 세계 1위로 도약시키는 토대를 쌓은 공로가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1981년 취임 5개월 만에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방미 길에 오른다. 부인 이순자 여사 회고에 따르면 전두환은 일본 열도를 지나던 전용기에서 창밖으로 후지산이 보이자 한국이 국민총생산(GNP)의 5%를 국방에 쏟아 일본 대신 소련 침략을 막아주는데 베트남 전쟁과 6·25 전쟁 덕에 부유해진 일본이 무임승차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화를 내더란다. 워싱턴에 도착한 전두환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안보 경협 비용 100억 달러를 받을 수 있게 일본을 압박해주면 그 돈으로 미국 전투기 등을 사겠다고 제안한다. 일제시대 일본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한반도에 2개 사단을 배치했던 걸 광복 후 한국군이 대신하고 있는데 그걸 환산하면 100억 달러라는 계산이다.
이에 수긍한 레이건의 지원을 배경으로 정부는 일본과 협상을 통해 40억 달러 차관 패키지에다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 허가까지 받아낸다. 이는 한국이 일본 반도체를 단순조립하던 하청국에서 제조국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다. 전두환은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반도체 기술을 얼마나 빨리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당시 오명 경제비서관 회고록 ‘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꾸며’). 반도체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군 중화학공업이 더 이상 성장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은 후 내놓은 전략산업이다. 경제기획원은 노동력밖에 없는 한국은 첨단기술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산업에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전두환은 반대를 물리치고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4메가 D램 개발을 미국 일본에 이어 3번째로 성공시켰다. 1986년 경쟁 관계인 삼성 금성 현대의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연구개발(R&D)비 400억원 가운데 300억원을 정부 예산으로 투입했다. 당시 13조원이었던 정부 예산이 올해 47배로 불어난 612조원임을 감안하면 반도체 R&D 지원금 300억원은 수 조원대의 가치가 있다. 든든한 지원금을 배경으로 한 R&D는 1992년엔 64메가 D램의 세계 최초 개발로 나타났다. 이후 94년 256메가 D램, 96년 1기가 D램, 2001년 4기가 D램, 2005년 50기가 D램 개발 등 ‘세계 최초’는 삼성전자의 수식어가 되다시피했다. 오명 회고록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혹자는 군부 독재에서나 가능한 정경유착의 결과물 아니냐고 깎아내릴 수도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 모범국가 미국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대만 일본 등의 동맹국 업체에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지원해가며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위한 ‘칩워(반도체 전쟁)’를 진두지휘하고 있지 않은가. 40여년 전 전두환식 보조금 정책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했다가 호되게 당한 일본도 세계 1위였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10조원 이상을 투입해가며 파운드리 반도체 1위인 대만의 TSMC와 손을 잡았다. 중국과 신냉전 중인 미국이 대만, 일본을 끌어들인 건 냉전시대 소련을 밀어내기 위해 일본을 견제하고 한국을 밀어준 것과 오버랩된다. 전두환은 일찌감치 이런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간파해 레이건과 연대했던 것이다. 중국 침공 위협에 시달리는 대만이 ‘실리콘 방패’로 미국과 일본에 생산 거점을 확보한 것도 그간 한국에 당했던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한국도 보조금 지원을 대기업 퍼주기로만 여기는 시각으로는 칩워에서 고군분투하는 반도체 기업들을 구출해낼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소환하듯 경제 안보를 지키기 위해 전두환식 해법이라도 소환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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