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감독이 데뷔작에 '인연'의 정서를 담은 까닭
"지난 20년간 본 최고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극찬대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한껏 영글은 기록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이 작품을 첫 연출작으로 내놓은 셀린 송 감독에게 한국 개봉은 감개무량한 순간이었을 테다. 그도 그럴 것이, 셀린 송 감독은 영화 〈넘버 3〉와 〈세기말〉을 내놓고는 돌연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다시는 메가폰을 잡지 않은 송능한 감독의 딸이다. 한국과 한국 영화계를 떠난 아버지 대신, 상상의 범위를 넘는 멋진 모습으로 모국 땅을 밟게 된 셈이니 말이다.
여느 호사가들은 이 같은 셀린 송 감독의 배경과 데뷔작으로 거둔 놀라운 성적에 주목할지 모른다. 정작 그는 '금의환향'이란 표현에 크게 거부감이 없다. 한국은 셀린 송에게 '뿌리'지만, 감독으로선 '순회공연' 중 머무는 하나의 무대다. 인생 선배로든, 업계 선배로든 아버지의 조언을 받진 않는다. 직접적으로 귀에 꽂히는 말보다는 아버지의 인생 그 자체를 조언으로 수용하며 살아 왔다는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개봉을 앞두고 〈엘르 코리아〉와 만난 셀린 송 감독은 작품과 관련해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고민 없이 이런 답변을 내놨다.
"부모님이 두 분 다 프리랜서고 아티스트예요. 인생에 배어 있는 직업적 생활방식들이 제게 자연스럽게 전해졌죠. 부모님의 역할이 '조언'은 아니니까 그걸 받진 않아요. 다만 한국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를 촬영하며 처음으로 영화인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분들이나 함께 작업했던 분들을 많이 접했죠.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리고 새로운 젊은 영화인들과 저 나름대로 연결점을 찾아가는 경험이 굉장히 뜻 깊었어요."
영화에 〈넘버 11〉이란 가상의 영화를 등장시키며 아버지의 감독 데뷔작 〈넘버 3〉 오마주를 야무지게 넣은 이유를 묻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영화 오마주를 계획했는데, 〈넘버 3〉를 연상케 하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화 제목을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넘버 1, 넘버 2, 넘버 3 등등이 이미 다 있는 거예요. 단 하나, '넘버 11'이 없더라고요. 그걸 쓰게 됐죠."
언급했듯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에게 동경했던 감독들의 칭찬과 각종 영화제 수상 및 노미네이트라는 '사건'을 선사했다. 콧대 높은 미국 아카데미에도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이 영화엔 현란한 기술이나 복잡한 각본이 없지만, '인연'의 정서가 극 전반을 지배한다. 〈패스트 라이브즈〉가 유독 서구권에서 호평과 인기를 얻은 건 생소한 정서를 다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셀린 송 감독의 관점은 이와 비슷한 듯 조금 다르다. 그는 영화 속에서 '인연'을 굳이 영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떡을 굳이 'Rice Cake'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연'은 '인연'이란 단어 말곤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리)의 관계는 딱 하나의 모양으로만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포괄하는 '인연'이라는 단어가 필요했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지만, 서구권에선 거기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을 뿐인 듯해요. 그래서 영화 속 '인연'의 등장으로 '인연'이 단숨에 설명됐을 것 같고요."
영화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시점을 달리하며 인연의 모습들을 담담히 비춘다. 노스탤지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라서인지 감독은 디지털 시대에도 35mm 필름 촬영을 고집했다. 촬영 과정도 아버지가 영화를 찍던 시절, 셀린 송의 유년 시절의 것과 비슷했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필름 촬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분량을 찍고 나선 필름 박스를 뉴욕으로 보내야 했어요. 검색대 통과할 때 엑스레이를 잘못 찍으면 촬영분이 다 날아갈 수도 있어서 조마조마했죠. 처음에는 필름 촬영이 얼마나 비싸고 복잡한지 모르고, '아, 왠지 이 영화랑 잘 맞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하지만 곧 'NG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 들였습니다. 필름이 뱅글뱅글 돌 때 물 소리가 나는데, 촬영하면서 농담처럼 '돈 흐르는 소리'라고 했어요. 어린 배우들한테는 그러지 않았지만, 어른 배우들한테는 NG를 안 내도록 겁도 줬어요(웃음)."
스스로도 말했듯,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 색채가 곳곳에 묻어 있다. 아티스트 부모, 열두 살에 떠난 이민, 각본가라는 현재 직업 등이 그렇다. 이에 대해 그는 10년 동안의 연극계 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인 곳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가 닿는다'는 신념을 얻었다고 말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건 바로 내 이야기라는, 창작자로서 그가 가진 굳은 믿음이었다.
"이번 영화를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하지만, 어떤 작품이든 항상 자전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 줘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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