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마음 읽기] 낭독과 그림과 글쓰기

2024. 3. 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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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면 인간은 삶을 끌어올리고 유지해줄 다양한 수단을 찾아 나선다. 글쓰기와 낭독, 그림 그리기는 그중 하나다.

말은 거의 늘 상대를 설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상적인 교감 역시 설득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고대 로마 시대부터 키케로의 『수사학』은 힘을 발휘해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의 효과를 어떻게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 책 한 권을 통틀어 알려준다.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으며, 의도하는 바는 간접적으로 숨자리와 리듬을 형성하며 에둘러갈 때 성취할 수 있다.

「 대상에 효과 발휘하기 위해선
장치와 형식 존중하는 것 중요
적절히 갖추는 형식의 제약은
그림·글·목소리에 생명력 부여

김지윤 기자

이렇게 인간은 언어 등의 관습을 갈고닦고 예법을 세련화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가 젓가락질을 배우는 것은 음식을 서툴게 집어 자신과 상대에게 불안감과 불쾌감을 일으키지 않기 위함이며, 남의 집을 방문할 때 과일 바구니라도 가져가는 것은 집주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깍듯이 드러내기 위해서다. 빈손은 경제적 궁핍이 아니라 무성의다. 형식은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점점 강화하고, 감정 역시 형식이 있어야 점점 고조된다. 즉 삶을 유지하는 데 형식과 관습은 간과될 수 없다.

그림 역시 하나의 형식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 그리고 가시성 너머의 구조를 그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보이는 것의 얕음과 속임수를 꿰뚫어 더 멀리 나가기 위한 도약이다. 이때 형식이 밑바탕이 돼준다. 색과 빛, 형태와 형태 아닌 것을 표현할 질감 있는 도구가 있을 때 그것은 물질성을 구현하면서 우리 감정을 강화한다. 붓질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흐름 속에 에너지를 싣는다.

나는 요즘 매일 하루 한 시간씩 그림 한 점을 그린다. 수채와 유채를 동시에 사용하며, 관념을 제거하고 관찰하는 대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붓질을 한다. 숲과 카페, 집과 사무실에서 그린다. 눈은 표면에 닿지만 표면 너머를 보려고 하며, 시야와 붓질 사이에 있는 공기를 느끼면서 그 호흡을 획으로 가져오려고 한다. 획에 떨림이 유지되고 있는지 자신할 순 없지만, 순간의 붓놀림 속에 아는 것, 즉 관념이 배어들지 않도록 애쓴다.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 진부함마저 있다면 죽도 밥도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 역시 공기 중의 소리인 말에서 시작된다. 출판사에서 하루 종일 원고를 읽고 집에서도 밥 먹을 때를 빼곤 말없이 책을 읽는다. 그러면 검정 글씨 속으로 땅을 파고 들어가 의미는 깊어지지만, 정작 그 문장들이 소리와 리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게다가 묵독으로 읽는 것은 속도를 빠르게 해주지만, 읽기는 말하기 속도와 비슷해야만 성찰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점점 체감한다. 어떤 예법이나 형식이 느리게 수행되는 것의 장점을 강조한 사람은 많다. 화가 폴 세잔은 “나는 그림을 아주 천천히 그린다”고 말했는데, 그래야만 시시각각 복잡한 형태를 정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 정답이 있지 않듯, 낭독에도 정답이 없지만 형식은 적절히 갖춘다. 즉 낭독자는 소리에 극도의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화려함보다 오히려 모노톤의 음색일 때 더 풍부한 것을 드러낼 수 있다. 가령 뒤라스는 텍스트를 단조롭게 낭독했다. “느린 구두법과 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마치 단어들의 옷을 벗기면서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찾는 것과 같죠.” 미국의 시인 존 애시베리도 소리 전문가가 연구할 만한 마지막 시인으로 꼽힐 만큼 시 낭독에 있어 전설적인 인물인데, 그 역시 절제되고 겸손한 하나의 음색으로 몽환성을 구사했다. 세잔이 살아 있을 때 그림을 ‘못 그린다’는 평가를 받았듯이, 애시베리의 낭독을 듣는 청중 절반은 지루하다며 자리를 뜬다. 하지만 소리를 연구하는 마리트 맥아더에 따르면 애시베리는 “넓은 모음을 그대로 살리는” 억양으로, 소리의 양감과 폭이 대단하다. 나는 애시베리의 음정과 타이밍의 절묘함을 분별하고자 다른 낭독자의 것과 비교하며 듣는다. 그러면서 활자들이 소리로 변할 때 문장 속 리듬을 더 잘 고칠 수 있고, 균형감을 조절할 수 있으리란 기대로 차오른다. 철학자 김영민 역시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낭독을 강조했는데, 낭독은 “혀와 입의 문제라기보다 차라리 정신의 고요한 지속성”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깨치는 앎은 내가 내 삶 안으로 맞아들이는 ‘형식들’에 의해 가까스로 획득된다. 형식은 일종의 제약이어서 닳은 붓을 쓴다든가 색깔을 두 가지로만 제한하는 등의 조건을 거는 게 효과적이다.

매일 하는 운동 역시 형식 안에서 수련되고 연마된다. 즉 어떤 효과를 노릴 때는 대상을 거칠게 다루기보다 장치와 형식을 마련해 통과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그림, 글, 목소리 모두 생명력을 간직하며, 매 순간 공기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두께감을 발휘한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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