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소멸 [김선걸 칼럼]
인문학에 해박한 한 중견기업인이 있다. 특히 유럽 역사 얘기를 하면 밤새는 줄 모를 정도다.
늘 학구열이 넘치던 이분이 교양서 읽기를 최근 딱 끊었다. 이제 경영이나 사업 구상 책만 읽는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직원들한테 미안해서’란다.
며칠 전이었다. 그 회사의 부장 한 명이 임직원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다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창업 공신 격인 사람이었다.
이 회사는 10여년 전 이 기업인과 직원 서너 명이 ‘맨땅에 헤딩하듯’ 모회사와 전혀 다른 업종에서 일궈낸 회사다. 프레젠테이션 중 초기 사업을 개척한 대목이 있었는데 발표자 스스로 그때 기억에 울컥한 것이다. 사업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임직원이 취미 생활에 빠져들 만큼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한 고참 부장의 흐느낌이 10여년 전 도전과 개척의 기억을 소환한 셈이다.
이 기업인은 “그간 초심을 잊고 있었다”며 “오너로서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말했다. 그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간 내가 일을 제대로 안 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기와 그 초기 멤버들이 더 늙기 전에 다른 도전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각성된 것이다.
이 기업인은 행복해 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 무뎌진 오너의 도전정신을 자극한 부하 직원이라니.
모바일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약간은 무지하고 많이 순수했던 시대가 있었다. 이른바 ‘개발 시대’다. 위의 얘기 같은 감동적이고 한편으로는 오글오글한 열정과 순수함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저 산이 있으니 오른다’며 정상을 향했던 시절 말이다.
요즘은 확연히 달라졌다. 초심도 시대적인 트렌드가 변하는 중이라고 한다.
한 대기업 HR 담당 임원 얘기다.
“요즘 신입 직원들은 마음가짐이 다르다. 예전처럼 열심히 해서 사장이 되겠다는 게 아니다. 상당수가 ‘건물주가 되겠다’는 초심을 갖고 입사한다. 자기 이익에 충실하고 언제든 회사를 옮긴다.”
경제는 양극화하고, 정보는 많고 빠르며, 취직도 결혼도 힘들다. 남에게 눈 돌릴 여유 없는 젊은 세대의 ‘건물주 초심’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래서인지 요즘 드라마들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은 생략하고 출생부터 황태자거나 비현실적인 초능력을 갖는다는 만화 같은 내용이 많다.
최근 의사들의 집단행동도 마찬가지다. 의사는 직업을 가질 때 선서를 하는 드문 직종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희생과 봉사의 의미가 녹아 있다. 정부의 갑작스러운 2000명 의대 증원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환자 생명이 촌각인데 집단행동에 나선 의사들의 초심이 최소한 ‘희생과 봉사’는 아니었을 거라는 짐작은 가능하다.
인구 소멸의 시대를 걱정함에 앞서 ‘초심 소멸’도 걱정이 된다. 회사원도 자영업자도, 심지어는 공적영역의 의사·법조인·군인·경찰·정치인·언론인이 모두 ‘건물주’가 초심인 것 같다. 이런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
개개인을 탓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든 사회의 보상 시스템부터 잘못이다.
초심을 지키고 헌신할 때 도파민이 분비되고 보상도 따라주는 사회가 돼야 미래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과 직군에 혜택을 주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 국가든 기업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야 다들 ‘진짜 초심’을 품고 살지 않을까.
문득 생각해봤다. 내가 언론인 입직할 때 초심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현실이라는 행로를 거치며 변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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