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미군이 폭격 위해 찍은 1945년 1월18일 서울

김규원 기자 입력 2024. 3. 4. 17:38 수정 2024. 3. 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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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스퀘어]서울을 찍은 가장 오래된 항공 사진…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
1945년 1월18일 미군이 항공 폭격을 위해 찍은 서울 강북과 한강 일대의 사진. 왼쪽 위 난지도부터 여의도, 이촌동 한강 백사장, 저자도, 잠실섬 등 한강 섬들의 모습이 보인다.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 제공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초 미군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서울을 폭격하기 위해 찍은 서울의 항공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항공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당시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과 함께 한반도에도 대규모 공습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전격적으로 ‘무조건 항복’하면서 실제 한반도 공습은 이뤄지지 않았다.

<매일신보>에 항공촬영 감지한 사진 실려

최근 용산 역사 전문가인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은 <한겨레21>에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1월 미군이 찍은 서울의 항공사진 파일과 이에 대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서울 항공사진 발굴과 시론적 활용’ 연구보고서를 제공했다. 김 센터장이 2023년 8~11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찾아낸 이 사진과 연구보고서를 보면, 미군은 1944년 말과 1945년 초 두 차례 걸쳐 한반도 중서부 상공을 비행하며 서울의 항공사진을 찍었다.

1944년 말 찍은 사진필름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1945년 초 필름은 모두 13장의 항공사진으로 남아 있다. 1차 항공촬영은 1944년 12월25일 밤 12시17분에 이뤄졌고, 촬영 고도는 2만7천피트(8200m) 상공이었다. 2차 항공촬영은 1945년 1월18일 오전 9시18분 이뤄졌고, 고도는 2만8천피트(8500m) 상공이었다. 이 항공사진을 찍은 항공기는 당시 최강 폭격기이던 비(B)-29였고, 미 육군항공대 468폭격전대 소속이었다. 당시 미 공군은 육군 소속의 항공대였다.

미군이 서울을 항공 촬영한 다음날인 1945년 1월19일 <매일신보>엔 ‘금후 대공습을 경계’ 등 제목으로 이 사실이 보도됐다.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 제공.

미군의 1945년 1월18일 항공촬영은 다음날인 1월19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금후 대공습을 경계’라는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금년 들어 우리 본토(일본) 공습을 격화하고 있는 적은 18일 오전 지나(중국)에 있는 미국 공군 비-29를 동원해 북중부 조선지구 상공으로 침입했다. 결전은 멀리 비도(필리핀)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리 위에도 적극 박도하고 있다.”

이 사진들이 어떤 목적으로 촬영됐는지는 명확하다. 이 사진들을 바탕으로 작성한 미군의 조사보고서(3급 기밀)가 2023년 발굴됐기 때문이다. 문서 6장과 사진 1장으로 이뤄진 이 보고서는 1945년 3월28일 미국 제20 폭격 사령부 사진 정보 파견대의 세실 뷰캐넌 중위와 조지 글렌드닝 대위가 뉴욕에서 작성했다. 사진은 1944년 12월과 1945년 1월 항공촬영한 사진을 합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임시의정원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보고서의 요약문 앞부분은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보고서는 서울의 서쪽, 동쪽, 남쪽 지역을 다룬다. 서울은 한국의 수도여서 많은 정부 건물과 군사, 정부 관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 도시는 철도의 중심이고 이 나라 연결과 물류의 결절점이다.”

1945년 3월28일 미군이 서울 폭격을 위한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첨부한 서울 일대의 사진. 주요 시설물 33곳을 표시하고 번호를 매겨놓았다. 임시의정원 아카이브.

용산 조차장·수색역 화물 야적장이 폭격 표적

이 보고서에는 서울의 33개 주요 시설이 표시돼 있고, 이 가운데 4곳을 폭격의 표적으로 지정했다. 용산 조차장(폭격 대상 43번)과 수색역 화물 야적장(124번), 한강철교(42번), 용산공작회사(210번) 등이다. 보고서는 용산 조차장이 한국에서 가장 큰 기관차, 화물열차 제조시설이고, 용산공작회사는 화물열차와 철도 장비, 광산기계를 제조한다고 밝혔다. 한강철교에 대해서는 부산으로 가는 주요 철도가 다니고 서울과 공업지역인 영등포를 연결한다고 밝혔다. 또 수색역은 평양과 부산, 인천 등으로 가는 한국 화물 물류의 중심지라고 설명했다.

미군이 폭격 대상으로 삼은 4곳은 모두 철도와 화물 관련 시설이었고, 이 가운데 3곳은 일본군이 주둔하던 용산 일대였다. 일본 본토의 배후지인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활동을 마비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용산공작회사의 폭격 번호가 210번인 것을 보면, 한반도의 폭격 대상은 최소 210개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서울의 군사방어 시설도 파악해 설명하고 있다. 경대공포는 10곳 39문, 중대공포는 7곳 29문이 설치돼 있으며, 탐조등도 9개가 설치돼 있다고 분석했다.

1945년 1월18일 미군의 항공 사진 가운데, 여의도(왼쪽 아래)와 이촌동 앞 한강 백사장(여의도의 오른쪽 아래), 도심과 용산기지(오른쪽 가운데)가 찍힌 48번 사진.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 제공.

미군이 서울에서 항공촬영을 하는 동안 일본은 미군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고 있었다. 1945년 3월10일 한밤중에 이뤄진 미국의 ‘도쿄 대공습’으로 사망 8만3793명, 부상 4만918명, 이재민 100만8005명의 피해가 일어났다. 미군은 2시간 동안 344대의 비-29 폭격기를 동원해 소이탄 등 38만1300발을 도쿄에 쏟아부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넘어선 피해가 발생했다.

이 밖에 보고서에 나오는 33개 주요 시설은 서울역, 청량리역, 아현터널, 한강인도교, 경성전기회사(동대문 전차 차고), 경성제국대학(대학로), 경성공업전문학교(대학로), 창덕궁(총독부 감옥으로 오인),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경성방송궁(정동), 기상대(서울시교육청 부근), 서대문형무소(서대문독립공원), 마포형무소(서부지법), 용산기지, 노량진 정수장, 여의도 비행장, 영등포 공업지구 등이다.

1945년 1월18일 미군의 항공 사진 가운데, 여의도(오른쪽 아래)와 난지도(여의도의 왼쪽 위)가 찍힌 49번 사진.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 제공.

미군은 한반도에서 서울만 촬영한 것이 아니다. 김 센터장의 연구보고서를 보면, 미군은 1944년 10월6일부터 1945년 5월6일까지 한반도를 41회 항공촬영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엔 제주, 통영, 장승포, 거제도, 부산, 평양, 신의주, 진남포, 원산, 함흥, 흥남, 성진, 단천, 나진, 청진, 영등포, 인천, 정주, 김포, 목포, 여수 등 전국의 주요 도시가 망라돼 있다. 41회의 촬영은 11일에 걸쳐 이뤄졌다. 특히 1944년 12월21일엔 17회나 항공촬영이 이뤄졌다. 서울을 촬영한 1944년 12월25일에도 2회, 1945년 1월18일에도 4회 촬영이 이뤄졌다. 김 센터장은 “41회도 미군의 한반도 촬영 횟수의 일부일 뿐이다. 이번에 포함하지 못한 것까지 고려하면 미군의 한반도 촬영 횟수는 100회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건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군사역사)는 “1944년이면 이미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있었지만,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본토 결전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미군도 영국군, 광복군까지 끌어들여 대규모 일본 상륙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8월에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미군은 상륙을 앞둔 8~9월에 일본과 한반도에 대규모 공습을 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 “한반도에도 대규모 공습이 가해졌다면 한국인들의 피해가 매우 컸을 것이다. 동시에 광복군이 일본 상륙작전에 참여했다면 한국도 승전국이 될 수 있었고, 분단을 피했을지도 모른다”며 “한반도는 일본 본토와 일본군이 점령했던 만주의 배후지여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

모래밭이 넓고 섬이 많은 한강

김 센터장이 입수한 항공사진 13장 가운데 현재 서울이 포함된 사진은 46번에서 50번까지 모두 5장이다. 옛 도심지인 강북 쪽은 대부분 찍혔으나, 미개발지인 강남 쪽은 거의 찍히지 않았다. 당시 한강은 모래밭이 넓고 물길이 좁으며 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난지도는 지금과 달리 섬 모양이 뚜렷했고, 여의도도 거의 절반이 백사장이었다. 이촌동 한강 백사장은 매우 넓었으며, 중랑천 하구 저자도도 매우 규모가 컸다. 잠실섬은 윗부분만 보인다.

1945년 1월18일 미군의 항공 사진 가운데, 중랑천 하구 저자도(왼쪽 아래), 잠실섬(가운데 아래)이 찍힌 46번 사진.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 제공.

이 사진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서울의 항공사진이다. 그동안 국토지리정보원이 보유한 가장 오래된 서울 항공사진은 1947년 1월11일 사진이었다. 한반도 항공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45년 10월22일 찍은 여수와 신안 사진이다. 앞서 김 센터장은 1945년 9월 미군이 찍은 용산 일대 사진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입수해 공개한 바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안영준 주무관은 “해방 전 서울 항공사진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해방 뒤 미군이 찍어서 국방부에 넘겨준 것이 가장 오래된 항공사진들이다. 한국이 스스로 항공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라고 말했다.

물론 일제도 서울에서 적지 않은 항공사진을 찍었다. 1936년 일제가 처음 만들었고 2015년 서울역사박물관이 책으로 펴낸 지도인 <대경성부 대관>은 1935년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항공사진은 찾을 수 없다. 이 책을 펴낸 박현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부장은 “해방 전에 일제도 서울의 항공사진을 찍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사진은 없다. <대경성부 대관>을 책으로 낼 때도 원본 사진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2017년부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서울의 항공사진을 찾아왔다. 해방 전 한반도 폭격을 위해 미군이 찍은 사진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동안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 정부에서 연구자들이 이런 자료를 찾고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의 보고서에는 어떻게 이런 사진 자료들을 찾아 신청하고 받아서 활용할 수 있는지 세세한 길잡이가 포함돼 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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