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타계 2주기' 이어령 선생이 본 한국인과 젊은이

박병희 입력 2024. 3. 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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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 이어령 선생의 타계 2주기인 지난달 26일 그의 생각과 지혜를 담은 책이 잇달아 출간됐다.

열림원에서 출간한 '이어령의 강의'는 선생이 생전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내용 10편을 가려 모은 책이다. 2000년 서울대학교 입학식 축사, 2010년 한국선진화포럼 월례 토론회, 2021년 서울대학교 후기 학위수여식 축사 등이 담겼다. 이어령 선생은 문화의 힘, 언어의 힘, 예술의 힘이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에서 젊은이들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고통과 외로움을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해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산업 기술이나 기계 기술의 패러다임, 금융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을 생명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파람북에서 출간한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은 선생의 유작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일본 번째 책이다.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는 모두 10권으로 구성된다. '너에게 묻는다' 4부작, '천지인' 3부작, '의식주' 3부작이다.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은 천지인 3부작의 완결편이다. 선생은 책에서 과학과 인문학을 두루 살피며 한국인의 외모에 얽힌 비밀을 풀어낸다.

바이칼호는 현대 동북아시아안의 선조인 고대 인류의 주요 기착지 중 한 곳이다.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미지의 바깥 세계로 담대한 여정을 떠났던 현생 인류 일부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선생은 한국인은 유독 눈이 작고, 코나 귀 등 신체 말단은 뭉툭하고, 털이 적고, 머리는 크다며 바이칼호의 혹독한 추위가 오늘날 한국인의 얼굴을 조각했다고 말한다. 다만 사람의 얼굴 생김새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만은 아니며 더 결정적인 요소는 문화라고 강조한다.

'나그네'라는 우리말은 아름답습니다. 어원은 더욱 아름답죠. '나간 사람'이라는 뜻인데, 문지방을 넘어 방에서 뜰로 나가고, 뜰에서 대문 빗장을 풀어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조금씩, 낯익은 것으로부터 낯선 세상 밖으로 나간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중략) 문화인류학자들은 말하죠. "사람들은 어떤 동물보다도 많이 걷는 데 그 특성이 있다"고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나 고릴라는 하루에 기껏 걸어봐야 3㎞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요. 그러나 수렵·채집 시대의 원인들은 하루의 보행거리가 30㎞를 넘었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은 인간과 똑같이 물건을 잡을 수 있지만 발의 구조는 달라요. 원숭이는 다리로도 나뭇가지를 잡을 수가 있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잡는 능력보다는 오히려 걷는 능력에서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가 생겨나요. 한마디로 걸어서 '나그네'가 된 원숭이만이 인간이 된 겁니다.(27~28쪽)

이런 한국인의 특성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 얼굴 대장정의 시작은 바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입니다. (중략) 이 호수에서 시작된 우리 조상들의 1만㎞가 넘는 대장정이 지금의 우리의 얼굴 모양과 무관하지 않아요. 신몽골로이드만이 바이칼호에서 영하 70도의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입니다. 얼굴 중에서 추위에 가장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부위가 코와 눈이에요. 혹독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코는 더 낮아지고, 눈두덩은 두꺼워지게 됩니다. 또 얼굴 광대는 튀어나오게 되었어요. 쌍꺼풀 없이 두툼해진 눈, 튀어나온 광대뼈, 납작한 코,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겪어보지 못한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남아 한 발 한 발 내디뎌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그래서 결국 한반도에까지 이른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얼굴입니다. 혹한이 만들어낸, 바이칼호가 만들어낸 조각이고 예술품이고 상징인 셈이지요.(59쪽).

이름은 내 것이지만 남이 부르기 위해 존재합니다. 남을 위한 것이죠.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죠. 인간은 거울을 통해 제3자의 시선을 빌려 자아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요? 바로 나 자신의 것이죠.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은 못 보는 것. 주인은 나지만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인, 그것이 얼굴입니다. (중략) 이름이라는 것이 내가 부르라 붙여진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부르라 붙여진 것이듯, 얼굴 역시 내가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보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름이나 얼굴은 모두 나 자신의 것이지만 남을 위해 존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항상 남들에게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73~74쪽)

뜨는 것과 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 차이는 아주 큽니다. 구름이나 풍선은 날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중에 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거품도 부평초도 물 위에 떠 있습니다. 대기든 물 위든 떠 있는 것들은 모두 타율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떠 있는 것은 바람 부는대로 물결치는 대로 밀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제 의지와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폭풍이 불어도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고 잉어는 급류와 폭포수의 물결을 거슬러 용문에 이릅니다. (중략) 죽은 고기만이 물 위에 떠서 물결을 따라 흘러갑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는 '뜬다'는 말을 잘 씁니다. 배우나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는 것을 뜬다고 합니다. 그냥 '뜨는 것'이 아니라 '띄워준다'라고도 하고 '띄워달라'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뜨기만 하고 날지를 못하여 물거품처럼 꺼지거나 풍선처럼 추락하고 맙니다. (중략) 한국과 한국인은 확실히 지구 공간에 떴습니다.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가 떴고 IT로 인터넷이 떴고 드라마와 영화로 한류가 떴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뜨기만 하고 아직 날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24~25쪽, 2008 서울대학교 입학식 축사)

우리는 매슬로의 5단계 욕구설을 인류 문명사에 확대시켜 그대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21세기의 글로벌 문명, 디지털 미디어와 네트워크 사회는 점차 후기 지식 정보의 생명 시대 - 저는 그것을 디지로그라고 명명했습니다마는 - 를 향해서 진화해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농업사회는 생리적 욕구, 산업사회는 안전 욕구라고 한다면 정보사회는 남과 소통하는 소속과 평가의 욕구입니다. 그러므로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그리고 정보사회는 그 욕망을 풀기 위해서 노동과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생명의 시대에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위해서 즐겁게 일하는 자기 목적적인 창조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시인, 화가, 음악가 같은 극히 일부의 예술가들, 혹은 철학자나 순수과학자들 그리고 성인군자들이 실천했던 자기실현을, 이제는 대중 전체가 추구하고 있습니다. (중략) 돈 받고 파는 프로그램을 리누스 토발즈의 경우처럼 소스를 공개하여 아무나 무료로 쓸 수 있게 하는 오픈소스들이 점점 증대하고 있습니다. 돈이 생겨서가 아니라 자기실현을 위해서 개방하고 공유하고 참여하는 웹 2.0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중략) 선진국 사람들은 지금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의 4백 배의 양을 소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19세기에 비해서 1천 배 이상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해졌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해답을 주기 위해서 웹 2.0의 인터넷 같은 사이버공간이 오프라인의 지상에서, 학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61~63쪽, 2007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학술원 설립 기념강연)

일본어를 아시는 분들은 이미 읽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언덕 위의 구름(사카노우에노쿠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을 그린 시바 료타로의 유명한 소설입니다.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말은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선진국의 문턱에 서서, 거대한 꿈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그 언덕에 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언덕에 비유해보면 선진국은 그 언덕 위에 솟은 구름인 셈입니다. (중략) 그런데 최근 일본인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태까지 그 언덕을 향해 왔고 또 구름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름이라는 것이 원래 덧없는 것입니다. (중략) 지금 우리가 모인 선진화포럼이라는 말 자체가 현재 선진국인 G7, G8의 대열에 우리도 들어설 것이라는 소망을 담은 말입니다. 우리가 선진국 문턱에서 턱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들어가게 되면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여태껏 그 '언덕 위의 구름'을 보고 뛰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재작년 우리는 이 '구름'이 다시 허망하게 사라지는 사건을 체험했습니다. 리먼 브러더스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주의, 특히 선진화의 우선 모델이었던 미국의 금융 시스템에 위기가 닥치는 걸 목격한 것입니다.(137~138쪽, 2010 한국선진화포럼 제42차 월례 토론회)

바퀴벌레는 절대로 배설물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미생물을 이용해 모든 것을 체내에서 리사이클 해서 3억년이나 살아온 바퀴벌레는 우리보다도 훨씬 선배입니다. 3억 년 동안 쌓아온 노하우로 절대 배설하지 않는데, 인간은 생산량보다 배설량이 훨씬 많은 것이 그동안의 산업자본주의였습니다. 1ℓ의 주스를 만들기 위해서 1t의 물과 폐기물을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짐승은 절대로 자원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버리는 것이 먹는 것보다 더 많습니다.(333~334쪽, 2010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 특강)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 이어령 지음 | 김태완 엮음 | 파람북 | 220쪽 | 1만6800원

이어령의 강의 |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376쪽 | 1만8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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