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궁 속에서 학업의 길 찾아
[김삼웅 기자]
▲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고등학교(옛 중앙고보) 교정에 세워진 6.10만세운동기념비.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권오돈(오상) 선생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
ⓒ 권우성 |
고향에서 농사일을 거들다가 주시경을 알게되고 국어공부에 뜻을 세운 그는 19살이 되던 해 봄 무단가출하여 서울로 왔다. 노무자들이 자는 봉놋방에 자면서 경성고보동창생들을 찾아 거처를 의논했으나 헛수고였다.
마침 같은 봉놋방에서 지내던 분이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자기 고향 교사직을 권하였다. 김포군 고촌면 천둥리에 있는 신풍의숙이었다. 학업을 계속하고자 상경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 김포에서 지내게 되었다. 소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일본 와세다중학 강의록을 구하여 독학을 하였다. 연말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봉놋방에서 지낼 때 옮은 옴 때문에 더 이상 객지생활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마을 사람들이 쌀 10섬을 그동안 수고비로 주었다. 그는 우마차에 쌀을 싣고 귀향했다. 이로써 간신히 무단 가출의 면치레가 되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백천온천에 다니며 옴 치료를 받았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다시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학구열이 치솟았다. 이를 가상히 여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 옥인동의 외갓집(새어머니의 친정)에 거처를 정하고, 직장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날 총독부의 임시토지조사국에서 고용원을 뽑는다는 방을 보았다. 찬밥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하고 1912년 8월 '토지조사령과 시행규칙'을 마련했다. 조세부담의 형평성과 소유권의 보호, 생산력 증진 따위를 내세웠으나 목적은 조선인 소유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런 사정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던 그는 일자리를 찾아 지원서를 내고 임용되었다.
직장이 마련되면서 수송동에 있는 야간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 공부하는 길이 열렸다. 중등학교는 백농 최규동이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낮에는 중앙학교에서 교사일을 하고 야간에는 중동학교에서 가르쳤다. 이희승은 최규동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뒷날 쓴 글의 한 대목이다.
최규동 선생님께서는 주간에 중앙학교 전임교사로 계시면서 야간에는 이 중동학교를 직접 경영하시며, 또 많은 시간을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대수를 배웠다. 그러나 이 대수라는 기계적인 지식만을 배운 것은 아니다. 선생님께 인생이란 것의 의의라든지 가치를 배웠고, 살아가는 도리를 배웠으며, 또 용기를 배웠다.
선생님은 자연과학 중에서도 순수이론인 수학을 가르치고 계셨지만 선생님의 성격은 이지적이라기보다 훨씬 정적인 인물이셨다. 즉 인정미가 매우 풍부한 어른이셨다. 그리하여 수업시간 중에 어떤 학생이 잘못하는 일을 발견하시면, 온정이 넘치는 언사로 사리를 따져서 순순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선생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선생님의 이와 같은 정열에 격한 말씀에 자괴지책을 못 이기어 등골에 땀이 흐르는 때도 있었고, 콧날이 시큰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낄 때도 많았다. (주석 1)
이희승은 최동식 선생에게 '인생'을 배우고 깨우친 바가 많았다. 그와 상의하여 사립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의 전신)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중앙학교는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김성수가 인수한 신생학교였다.
중앙학교로의 편입은 내 인생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경성고보를 뛰쳐나오면서 시작된 오랜 방황을 끝낸 것이고, 중앙을 졸업하게 된 인연으로 경성방직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곳에서의 6년간 사회생활을 밑거름으로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 2)
당시 중앙학교는 유능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교장은 석농 유근, 학감은 민세 안재홍, 교사진은 기하에 이강현, 화학에 나경석, 대수에 최규동, 조선어에 이규영, 지리, 역사에 이중화·그림에 고희동, 창가에 이상준, 체조에 김성집 등이었다.
학우들 중에는 뒷날 이름을 날린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윤치영 씨는 학교 때 이름 있는 야구선수여서 지금도 몸매가 빠르고 정정하고 정문기 씨도 야구선수로서 후에 유명한 어류학자가 됐다. 이희준 씨는 우리나라 수문학(水文學)의 개척자로서 조선전업 파일전력사장을 역임했고, 이희승 씨는 학교 때부터 국어학에 입지하여 이 방면의 대가가 됐으며, 유홍 씨는 어려서부터 활달한 성품이더니 해방 후 정계에 투신, 활약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중앙학교는 응원·용견·성신을 교지로 하는 4년제 중학으로서 "흘러흘러 흘러서 쉬임이 없고 / 솟아솟아 솟아서 그지없는 / 흰 뫼와 한 가람은 무궁화 복판 / 거기 솟은 우리집 이름도 중앙"이란 교가를 목청껏 부르며 뛰놀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 (주석 3)
이희승은 1918년 3월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경성직뉴주식회사에 서기로 취업하여 1년 반 동안 근무했다. 직조공장에 취업한 그는 회사 숙직실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돈을 아꼈다. 대학에 들어갈 입학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각 분야에 걸쳐 책을 읽었다.
직조공장 서기로 일하던 이 무렵, 나는 많은 책을 읽었다. 일본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을 밤새워 읽어 제쳤다.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특히 내가 감명을 받은 책들이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되어 한동안 독서를 중단해야 할 정도였는데, 이것이 모두 파고드는 성격 탓이 아니었나 한다. 나는 잃은 건강을 도로 찾기 위해 새벽 구보를 열심히 했다. (주석 4)
주석
1> 이희승, <잊을 수 없는 스승>, 앞의 책, <한 개의 돌이로다>, 51쪽.
2> <회고록>, 55쪽.
3> 서항석, <중앙학교의 초기 학생들>, <동아일보>, 1982.1.1.
4> <회고록>, 63~6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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