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끼리 쓰다듬은 죄…하루키 소설 못 산다, 러 금서 소동 왜 [세계 한잔]

서유진 2024. 3. 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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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의 숲』,『스푸트니크의 연인』(무라카미 하루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향연』(플라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오스카 와일드) "
최근 러시아에서 '금서(禁書) 소동'에 휘말렸던 책들의 목록이다. 일본 아사히계열 잡지 아에라 최신호는 러시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등 작가 205명이 쓴 책 252권을 금서로 지정한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폭로가 나와 당국이 수습에 나서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일본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등이 최근 러시아에서 금서로 지정됐다는 보도가 나와 '금서 소동'이 일어났다. 사진은 2021년 일본 와세다대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개관 기자회견에 참석한 하루키. AP=연합뉴스


앞서 지난달 21일 러시아 독립언론 메두자는 '오스카 와일드, 무라카미,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라는 기사에서 러시아 내에 도는 금서 리스트를 폭로했다. 매체가 입수한 '금지된 정보(LGBT)가 포함된 상품 목록' 명단에는 작가 205명이 쓴 책 252권이 들어있었다. 여기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요시모토 바나나·미시마 유키오, 미국 소설가 스티븐 킹과 함께 오스카 와일드,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이 담겼다. 러시아 언론 코메르산트도 "러시아 소매 대기업인 '메가마켓'이 금서 목록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전했다.

이들이 금서가 된 이유는 성(性) 소수자(LGBT,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 관련 묘사가 있어서라고 매체는 전했다. 예를 들면 하루키의『노르웨이의 숲』에는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쓰다듬어준다'는 표현이 나온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는 여주인공이 여성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에도 여성이 좋아하는 여성과 동거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매체에 따르면 일부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하루키의 소설은 '연애의 교과서'로 여겨져 인기가 높다고 한다. 책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민음사.


매체는 러시아에서 금서 목록이 돌게 된 건 2022년 12월 나온 'LGBT 선전 금지법 개정안'과 관련이 있다고 전했다. 개정안에는 '전통에 반하는 성적 관계를 가지는 것, 성전환을 홍보하는 정보의 유포를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서 금서를 팔면 출판사의 경우, 벌금 80만~500만 루블(약 1200만원~7200만원)을 내야 한다. 개정안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해 이뤄졌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이와 관련, 메가마켓 측은 "금서 목록은 업계가 '금지법 개정안' 채택을 앞두고 만일에 대비해 만들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파문이 일자, 러시아 통신판매협회의 소콜로프 회장은 지난달 21일 국영 노보스티 통신에 "(금서)리스트는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면서도 "지금은 유효하지 않다"면서 사태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아에라는 "취재진이 러시아 인터넷상에서 금서 구매를 시도했으나, 하루키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 등 일부 책은 메가마켓에서 입수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금서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여전히 서슬 퍼런 당국을 의식해서인지 시중에서 해당 도서를 사거나 파는 게 어렵다는 얘기다.

아에라는 "푸틴이 '왜곡된 가치관'으로 간주하는 대표주자가 LGBT"라면서 "이번 금서 소동은 권력자에 대한 손타쿠(忖度, 명백한 지시 없이 윗사람이 원하는 바를 헤아려 일을 처리하는 것) 때문에 벌어진 결과"라고 꼬집었다.

LGBT 활동가들이 2020년 7월 15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헌법 개정에 대한 전국 투표 결과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무지개색 귀고리 했다고 5일 구류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성전환자 권리를 조롱하는 발언을 되풀이해왔으며, 러시아에서 LGBT 정체성에 대한 공개 표현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관련 운동가, 변호사, 문화계 인사들을 수감하고 있다.

2015년 8월 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피켓 시위 도중 경찰이 무지개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와 이야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앞서 지난달 1일 러시아에서 대법원이 성소수자 운동을 '극단주의'로 규정해 사실상 불법화한 후 처음으로 성소수자 운동에 대한 유죄판결이 나왔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러시아 남부 볼고그라드 법원은 온라인에 LGBT 깃발 사진을 올린 한 남성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면서 벌금형 1000루블(약 1만5000원)을 내렸다.

올해 1월 29일에는 모스크바 동쪽에 있는 니즈니노브고로드 법원이 카페에서 무지개색을 띤 개구리 모양의 귀고리를 했던 여성에게 5일간의 구류를 명령했다. 이 여성은 당시 카페에서 귀고리를 빼라고 요구한 남성이 영상을 온라인에 올린 뒤 경찰에 소환돼 조사받았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러시아 대법원이 'LGBT 국제 대중 운동'의 러시아 내 활동을 금지하기 위한 행정소송에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사실상 불법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 7월 푸틴 대통령은 공식 문서와 공공 기록상 성별 변경은 물론 성전환을 위한 의료적 개입을 불허하는 법에 서명했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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