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던 낭만주의 화가들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수년 전 영화 시상식 수상 소감 연설에서 미국의 배우 조디 포스터는 자신의 사생활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유명인 그것도 예술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상상을 초월하는 드라마틱한 사생활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가에게는 이렇다 할 사생활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대부분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친구도 별로 없고, 정상적인 가족관계도 없으며, 불필요한 교제는 물론 감정을 소모하게 될 인간관계를 피하는 경우가 많다. ‘창작은 엉덩이로’라는 말이 있듯, 예술은 영감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랜 훈련과 숙련의 지난한 시간 속에서 탄생하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일화가 전혀 없는 예술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확실히 대중은 고통을 겪은 유명인에게 더 큰 애정을 느낀다. 예술가에게 애착을 느끼려면 작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의 사랑에서 밀려난 유명 화가가 있다. 바로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년)다. 낭만주의(romanticism)란 신고전주의의 차갑고 건조한 조형 형식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양식이다. 진정한 예술가가 탄생했던 시대, 즉 예술가의 진솔한 개성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기 시작했던, 소위 천재와 광기의 시대를 일컫는다. 이런 낭만주의의 가장 주요한 키워드는 ‘동경’이다. 동경이란 먼 곳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기에 낭만주의는 감정, 격정, 황홀, 경이, 야성, 충동, 영감, 직관 등 그야말로 지금까지 배제돼왔던 주정적인 개념을 부활시킨다.
낭만주의의 대표작인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1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군다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8년)’ ‘알제리의 여인들(1834년)’ ‘키오스 섬의 학살(1824년)’ 등의 거칠고 환락적이며 혁명적인 작품들을 보면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인지가 무척 궁금해진다. 아마도 작품만큼 열정적이고 격정적일지도 모를 들라크루아가 들려주는 스펙터클한 개인사에 대한 기대 탓이다.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우리를 배신한다. 그림과는 전혀 다르게 인생의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가 전혀 없고, 삶을 특징 지을 만한 외부적 사건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이 낭만주의 화가의 일생은 특별히 낭만적(romantic)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들라크루아는 영국의 위대한 낭만파 시인 바이런(1788~1824년)을 흠모했으나 그의 정열이나 일탈은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1832년 그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준 모로코 여행을 다녀온 것 말고는 파리를 벗어난 적도 없으며, 많은 동료 화가들이 대가의 원화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날 때도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낭만적인 일 중 최고의 거사인 연애는 어땠을까? 들라크루아의 연애사는 시시했다. 물론 여자관계에 성적으로 얽혀든 적은 여러 차례 있었고, 리제트라는 뛰어난 한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혼할 꿈을 품었으나 곧 단념했다. 이처럼 들라크루아에게는 기념할 만한 연애 사건도 전무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까지 28년간 곁에서 돌봐줬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는 가사도우미 제니 르 기유였다. 그가 제니의 초상화를 그렸고, 일정액의 유산과 작품 등을 남겼던 것으로 미뤄봐 그녀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감정은 자신에게 평온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던 그녀의 헌신에 대한 보답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사랑은 많은 시간과 공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여자 없는 평온한 삶에 안주하기로 마음먹었다. 불가피한 고독이 오히려 예술에는 득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 경험하는 것들은 훨씬 더 강렬하고 훨씬 더 순수하다.”
이처럼 그는 그림과는 다르게 삶 전반에서는 방어적이었으며, 정열을 두려워하고 평온을 소중히 여겼다.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낭만주의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년) 역시 삶이 그림 뒤로 물러나 은폐돼 있다. 그는 건축가의 도제로 일을 시작했고 14세에는 왕립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24세에 왕립아카데미 준회원이 됐고, 27세에는 정회원이 됐다. 30대 중반에는 아카데미 교수가 됐고, 만년에는 회장까지 역임했다. 여기까지가 20대에 이미 명성을 거머쥔 조숙한 천재 터너의 지배권력에 순응하는 주류의 삶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명성을 얻고 난 후 은둔의 삶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허름한 차림새에 괴팍하고 매력도 별로 없었던 터너는 친한 친구도, 제자나 후계자도 없었다. 그저 유일한 친구라면 30년 동안 함께 살았던 스튜디오 조수이자 요리사 겸 정원사였던 아버지다. 그의 나이 5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을 만큼 아버지와는 잘 지냈다. 들라크루아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터너는 가정부 사라 댄비와의 사이에 두 딸을 낳았다. 그러나 금전적으로도 인색했고 잘 보살피지 않았던 것 같다. 터너의 본가에는 부스라고 부르는 가정부가 있었는데, 터너는 그녀에게서 성적 욕망을 해소했던 것 같다. 그는 본가와 가까운 첼시에 아무도 모르는 은거지를 만드는 등 점점 더 극단적으로 주류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는 소피아 캐럴라인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이름을 바꿔 생활했고, 아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정신분석학에 ‘리비도의 경제학’이라는 말이 있다. 리비도를 한곳에 다 투자하면 위험하니 분산 투자하라는 설인데, 한쪽에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다른 곳에 쓸 에너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예술의 세계에선 안전한 투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조화와 균형보다는 과잉 혹은 결핍의 메커니즘이 훨씬 더 효력을 발휘한다. 그림 속에서 들라크루아는 거친 남성이 돼 여성을 강간하고 납치하고 폭행한다. 142㎝ 단신의 왜소한 들라크루아가 사자가 돼 먹잇감을 물어뜯는 순간이다. 현실과 가상은 이렇게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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