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귀한 우리 아들 죽였다'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민병래의 사수만보]

민병래 입력 2024. 3. 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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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 87년 9월 8일 7327부대에서 숨진 최우혁 이병의 아버지 최봉규, 형 최종순 ②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 <편집자말>

[글쓴이: 민병래(작가)]

- 1편 <쓰레기소각장에서 죽었다는 아들, 의혹은 더 커졌다>에서 이어집니다.

부검은 9월 9일 오후 4시에 진행되었다. 최봉규는 산부인과 의사인 친구, 아들 최종순, 처조카, 우혁이 친구 용석이와 함께 부검장으로 들어갔다. 이기범이라는 대위가 우혁이의 군복을 벗기고 가슴에 칼을 대는 순간 최봉규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휘청대는 몸, 땅이 꺼지고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두 시간이 지났을까. 군검찰관은 "기관지와 폐에 그을음이 가득한 걸로 보아 질식 및 쇼크사가 분명합니다"라고 말했다. 최봉규는 허탈했다. 이 부검으로 '우혁이 죽음의 모든 의문'이 묻힐 것 같았다. 헌병대장이 강력하게 부검을 주장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최봉규는 무기력하게 부검에 동의한 자신을 책망하며 가슴을 치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군은 이런 최봉규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대 내에 많은 사무가 있는데 최 이병 사건으로 모든 게 늦어지고 있습니다"라며 장례를 재촉했다.

3일장이면 9월 10일은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 날. 전날 최봉규는 우혁이의 친구들과 병원 앞 식당에서 긴한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들은 부검은 막을 수 없었지만 장례는 '학생장'으로 치르자고 제안했다. "우혁이의 죽음이 사회문제화 되지 않으면 또 다른 청년이 우혁이 꼴을 당합니다. 우혁이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간곡하게 얘기했다.

최봉규는 공감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부터 1984년까지 1152명이 '강제징집'을 당했고 1192명이 녹화공작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대 80학번 김두황, 성균관대 81학번 이윤성, 연세대 81학번 정성희 등 9명이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 강제징집 녹화공작의 희생자 9명.  왼쪽 위부터 김두황(고려대 80학번), 최온순(동국대 81학번), 김용권(서울대 83학번), 이진래(서울대 77학번), 최우혁(서울대 84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 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 정성희(연세대 81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전두환 일당이 자행한 녹화사업은 프락치 강요로까지 이어졌다. 이 만행의 시작은 1982년 청와대에서 열린 보안사의 전반기 업무보고 자리였다. 여기서 운동권 출신 입대자들이 군내 반정부 낙서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전두환은 대공처장인 최경조에게 "야, 최경조 너 인마 뭐 하는 거야"라고 질책했다. 이날을 계기로 보안사가 주도하는 녹화사업이 마구 자행되었다(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당시 보안사대공처장이었던 최경조가 진술한 내용).

최봉규는 그런 정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이틀 동안 군의 태도를 보며 이를 뼈저리게 느꼈기에 친구들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혁이의 죽음이 학교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장이 제대로 치러질까 염려되었다. 또 최봉규나 가족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두 아들은 꼬박 밤을 새우며 부검 때문에 헌병대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초췌한 상태였다. 아내는 살아있는 두 아들마저 탈나겠다며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이런 상태에서 학생장을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또 군에서 학생장 계획을 알게 되면 시신을 순순히 내줄 리도 없을 것이기에 가족장으로 하되 선산으로 가면서 학교에 들려 노제를 치르는 것으로 우혁이 친구들과 의견을 모았다.

"시신은 군에 귀속되어 있으니 내어줄 수 없다"

최봉규는 9월 10일 아침, 전날 학생들과 얘기한 대로 우혁이를 선산에 묻겠다, 시신을 일단 의정부병원 영안실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7327부대장 권 대령은 "딱 잘라서 말씀드리는데 시신은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군인은 사망했어도 군인 신분인 만큼 군 장례식으로 해야 합니다"라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사고 당일 "화장을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고 매장을 원하신다면 시신을 드리겠다"라고 한 얘기를 뒤집었다.

최봉규는 "내 자식의 주검조차 내 마음대로 못한단 말인가?"라며 따져 물었다. 권 대령은 요지부동이었다. "군에 귀속되어 있다, 군 장례식이어야 한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가까운 운경공원묘지에 좋은 자리를 준비했고 비용까지 치렀다"라고 덧붙였다(보안사는 최우혁의 죽음을 접한 서울대생이 학생장을 준비하는 등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고 7327부대에 시신을 내어주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최봉규는 부대장의 반대에 가로막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을 불러모았다. 큰아들은 "군의 도움을 받지 말자"면서도 아버지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종누나는 가매장을 한 셈으로 치고 나중에 선산으로 옮기자고 했다. 아내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두 아들을 보며 "산 놈마저 잡겠다"며 안절부절 못했다.

최봉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먼 산은 무심히 돌아앉았고 바람은 초겨울인 양 차갑게 목덜미를 파고 들었다. 그의 눈앞에 그을린 막내의 몸, 메스에 베어지고 다시 꿰맨 아들의 몸뚱이가 어른거렸다. 최봉규는 천천히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자"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때 가족 옆에서 엿듣던 중령 하나가 수신호를 보냈는지 눈 깜짝할 새 영구차가 들어왔다. 흰 장갑을 낀 군인들이 관을 옮겼다. 최봉규가 직접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밀고 나갔다. 영현실 앞에 있던 학생들은 최봉규가 이를 멍하니 지켜보니, 어찌하지를 못했다.

그때 점심을 먹고 돌아온 김세진군의 아버지가 운구차에 관이 실리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항의했다.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님도 운구차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들의 외침은 채찍이 되어 최봉규의 가슴을 때렸다. 최봉규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운구차 뒤에 있는 군용버스에 올랐다. 운구차가 병원 정문 옆을 지날 때 어느새 나와서 모였는지 친구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라 최봉규는 자식의 죽음 앞에 무기력한 애비라고 자신을 탓하며 굵은 눈물을 떨궜다.

드러나는 진실

우혁이의 3주기를 치르고 얼마 후인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이 있었다. 윤석양이 폭로한 서울대생 동향파악 대상자 387명 중에는 최우혁의 이름이 있었다. 최봉규는 우혁이 죽음의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고 자책하면서 1988년부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일에 나선 터였다.

최봉규는 사실, 사고 다음 날부터 보안대가 우혁이 죽음에 어른거림을 느꼈다. 전두환 정권은 녹화공작이 들통나자 대국민 사과를 하고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선도공작이라고 이름만 바꿔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우혁이가 입대할 때 내심 걱정이 있었으나 그래도 시위를 주동하거나, 확실한 전과(?)가 있는 건 아니어서 괜찮으려니 생각했었다.

우혁이 부대가 속한 20사단의 보안대장이 빈소에 나타난 건 우혁이가 숨진 다음 날인 9월 9일, 부대장인 권중원 대령과 함께 늦은 밤이었다. 그는 "제가 최 이병(우혁)을 여단장에게 추천해서 정보과에서 쓰도록 하였습니다"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때는 무심결에 넘겼는데 보안대에서 우혁이를 주시하고 부대장과 우혁이 보직 등에 대해 세세히 상의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또 친척들 앞에서"(최 이병은) 가정이 불우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보았다"라고 말했다. 논산훈련소에서 우혁이가 생활기록부에 그렇게 작성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군에서 생활기록부를 쓴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당시는 경황이 없었으나 보안대가 우혁이를 심문해 학생운동에 대한 자술서를 받고 가정환경까지 캐물었다는 것을 실토한 셈과 다를 바 없었다. 아내에게는 "(최 이병) 너 잘해야지, 잘못하면 전방으로 갈 수도 형무소로도 갈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고 떠들었다.
  
▲ 최우혁의 가족사진 왼쪽 두번째가 최우혁이고 누나 최문정의 중학교 졸업식 사진이다.
ⓒ 최우혁기념사업회제공
 

의혹은 사실 끝이 없었다. 헌병파견대 사무실에서 우혁이 유품을 받을 때 한쪽 구석에 똥이 지려 있는 팬티가 있었다. 당시는 그게 왜 거기에 있고 누구 것인지를 캐묻지 못했다. 그뿐인가, 끝까지 시신을 내주지 않은 것도 모자라 장례식날 운경공원묘지에 인근 예비군부대 병력까지 동원해 보초를 세우고 삼우제에 갔을 때도 여전히 묘소를 지키고 있었다. 우혁이가 정녕 자살했다면 이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의문이 윤석양 일병이 폭로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거기에 서울대생의 명단이 있었고 우혁이의 이름 석 자가 담겨있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실마리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최봉규는 윤석양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한층 더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우혁이 장례를 치른 그달에 바로 청와대로 긴 탄원서를 보냈었다. 해당 기관에 이첩했다는 답신이 왔고 그 후 돌아온 헌병대의 답변은 종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 최봉규가 농성에 참여한 모습 그는 1988년부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참여했다.
ⓒ 최우혁기념사업회제공
 
그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나가 총무를 맡고 '의문사지회'를 만들었다. 최봉규는 '유가협'의 살림을 알뜰히 꾸려 '총무 아버지'라는 애칭을 얻었다. 유가족의 사연이야 다 가슴이 사무치지만 자식을 여읜 부모의 아픔보다 클 수 있겠는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어깨도 처져가는 육순이 넘은 나이들이지만 자식 잃은 부모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최봉규와 의문사지회의 부모는 근거지인 농성장만 지키는 게 아니었다. 민주화운동과 연대하는 곳이면 어디에든 출동하는 별동대였다. 최봉규가 1989년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백골단에 맞아 이마가 깨지는 상처를 입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최봉규는 1993년부터 '의문사 전면재조사촉구 서명운동'에 나섰고 칠순을 바라보는 1998년 11월 4일부터 422일 동안 국회 앞에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했다. 잠은 한뎃잠. 스티로폼에 종이 박스를 얹고 이불을 얼기설기 깔아놓은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밥은 지어 먹을 수 없으니 불어터진 짜장면이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웠고 따뜻한 국밥이라도 먹을 때는 행복했다.

어쩌다 옷을 갈아입으려 집에 들어가면 아내 강연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녁에게 큰 짐 지우고 나만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물기 많은 음성이었다. 최봉규는 아내의 음성을 감싸며 "우혁이 한 풀고 나도 당신 곁으로, 우혁이 곁으로 갈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대답했다.

아내가 떠난 날은 1991년 2월 19일, 몹시 추웠다. 마포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화곡동에 있는 성모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거기엔 싸늘하게 식은 아내 강연임이 하얀 천에 뒤덮여 있었다. 우혁이의 죽음 이후 아내는 거의 넋을 잃었다. 군대를 가라고 성화를 부린 자신이 귀한 아들을 죽였다고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입버릇처럼 불구덩이를 쓰고 죽겠다고 말했다.

아내의 혈압은 높아졌고 끝내 안압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989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실어증, 기억상실, 신경쇠약, 정신이상이 닥쳤다. 어쩌다 외출을 하면 집을 못 찾아 골목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최봉규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거리를 헤매 어느 담장 밑에서 떨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고 당신 탓이 아니라고 꼭 끌어안았다. 함께 살아서 우혁이 한을 풀자고 되뇌면 아내는 슬픈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내는 당산철교에서 차가운 물살에 몸을 던졌다. 아들은 불구덩이에서 아내는 얼음 같은 겨울 강물에서 숨을 거뒀다.
  
 1987년 서울대에서 열린 최우혁의 학생장. 어머니 강연임님의 모습이다.
ⓒ 최우혁기념사업회제공
 
아내의 빈자리는 컸다. 큰아들 내외가 결혼하면서 줄곧, 아내가 떠난 후에는 더욱 정성으로 챙기지만 아내가 없는 집은 쓸쓸한 들판이었다. 최봉규는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를 냈다. 막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무너지는 마음, 꺾이는 다리를 곧추세워 '동지'가 기다리는 국회 앞 농성장으로 향했다. 거기엔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봉규와 많은 유가족의 노력으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은 1999년 12월 30일 국회 문턱을 넘었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기는 최우혁의 죽음이 '공권력에 의한 사망'이라고 공식 인정했다. 최우혁은 2008년 8월 27일 서울대에서 "재학 중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자신을 희생한 공로"를 기리는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이날 최봉규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옆 '민주화의 길'에 서 있는 최우혁의 추모비를 찾아 이 졸업장을 전했다. 2010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고 일부 보상도 받았다. 그리고 2014년에는 아들을 운경공원묘지에서 마석의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옮겼다.

친구 김치하·황인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최우혁기념사업회는 오래전부터 이장에 관한 뜻을 모았던 터였다. 특히 우혁이가 입관할 때 입은 군복을 벗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런 과제를 마치고 최봉규는 폐암으로 투병을 하다 2016년 2월 10일, 86세에 숨을 거뒀다.

그는 우혁이의 죽음 앞에서 "나는 이제 네가 죽은 것에 대해서는 그리 슬퍼하지 않을란다. 부디 나에게 힘을 주어 너의 비참한 죽음을 알리게 하고, 너와 같은 뜨거운 피를 가진 청년들이 죽어 자빠지게 만드는 부조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바란다. 어쩌면 이제부터는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차가운 강은 없어도 좋을 법하구나"라고 다짐했던 대로 살았고 마침내 아들 곁인 모란공원에 묻혔다.

- 3편 <40년간 맴돈 질문, 보안사의 누가 내 동생 죽였나>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최우혁열사기념사업회가 2017년 만든 <30주년추모집>에 나온 '최봉규'의 회고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인터뷰에 응해주신 최종순님과 기념사업회 관계자,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조종주 사무처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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