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 기절시킨 '얼굴천재' 연주…외모 가리자 피아노 돌렸다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어떤 사람들은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들 말하지만, 잘생긴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그것을 진화의 결과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외양이 신체 능력과 건강을 보여주는 척도이므로 당연히 잘생긴 이성을 만나야 건강한 후손을 얻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그러니 잘생긴 사람들에게는 외모가 일종의 권력이다. 뛰어난 외모가 대단한 추천서 못지않은 효력을 발휘하니까. 특히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에서 외모는 기본이다. 그래서일까. 예능계에서 얼굴을 손보지 않은 사람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니체 “디오니소스를 닮은 당신” 찬사
음악사에서 연주자의 비주얼 열풍을 이끈 음악가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다. 무엇보다 그는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리스트는 자신의 잘난 외모를 어떻게 활용해서 대중들에게 어필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그는 피아노 연주사에서 최초로 커다란 피아노가 자신의 모습을 가리지 않도록 피아노의 방향을 옆으로 돌려놓은 사람이다. 잘생긴 옆 모습을 드러내고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손가락이 건반을 현란하게 넘나드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강하게 건반을 내려쳐서 피아노의 현을 끊어트리는 것도 리스트의 인기를 높이는데 한몫을 했다.
당대 사람들은 낭만주의가 지향하는 초월에 대한 갈망을 리스트에게 투영해 그를 지구에 강림한 그리스의 신에 비유하기도 했다. 동화작가로 유명한 안데르센은 리스트를 “현대판 오르페우스”로 묘사하였고, 그가 살롱에 들어서면 전기 충격을 받은 듯 귀부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진지한 철학자 니체마저 “황홀경과 도취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닮은 당신”이라며 리스트에게 찬사를 보냈다.
신은 자신의 자리를 결코 사람과 나누지 못하는 법. 리스트는 여러 명의 주자가 차례로 등장해서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던 당시 연주회 관습을 깨고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무대를 홀로 꾸렸다. 리사이틀로 불리는 단독 콘서트의 기원이다.
리스트의 공연에서는 종종 청중들이 기절하거나 황홀경에 빠지곤 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 특이한 현상을 리스토마니아라고 불렀다. 잘생긴 외모에 타고난 쇼맨십으로 리스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라갔고, 그는 유럽 최고의 유명인사가 되어 부와 명예를 누렸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것일까. 대중적 인기로 인해 오히려 리스트는 가장 오해를 많이 받는 음악가가 되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부풀려지기 일쑤였고, 화려한 쇼맨십으로 인해 그의 음악적 깊이와 예술성은 늘 의심을 받았다. 대중들에게는 그저 그가 어느 여성과 사귀고 있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리스트로서는 억울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얼굴이 잘나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리스트는 밑바닥에서부터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실력을 쌓았고 그래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빈으로 진출한 후 체르니로부터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고 성공적인 데뷔를 할 수 있었으나, 그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직장도 버리고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파리까지 왔던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한 후 리스트는 졸지에 홀로 된 어머니까지 부양해야 하는 소년 가장 신세가 되었다.
이제 정말로 기댈 곳이 없어진 청년 리스트는 자기 실력만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이 시기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파가니니의 초인적인 바이올린 연주는 그에게 명확한 역할 모델을 제공했다. 압도적 카리스마와 눈부신 기교로 무대를 압도하는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통해 보여준 음악적 성취를 자신은 피아노로 해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만큼 현란했던 파가니니의 연주 기술을 피아노로 구현하는 것이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리스트는 그러나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정열을 불태웠다.
그는 오랜 시간 혹독할 정도로 기교 연습에 매진했고, 엄청나게 세게 힘을 주어야 건반이 눌러지도록 특수 제작한 연습용 피아노까지 마련해 실력을 연마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마침 피아노의 기술적 개량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던 때라 리스트의 초인적인 기교가 피아노를 통해 그대로 구현될 수 있었다. 새로 부착된 철제 프레임 덕에 건반을 강하게 내려쳐도 피아노 몸체가 뒤틀리지 않았으며, 압력을 지탱할 수 있는 고정 장치 덕에 현이 끊어지는 일이 줄고 더 크고 풍성한 소리를 냈다. 이중 이탈 장치 덕분에 건반도 빠르게 원위치로 올라와 매우 빠른 속주가 가능해졌다. 리스트가 피아노로 얼마나 창의적이고 참신한 테크닉을 즐겼는지는 그가 작곡한 6개의 ‘파가니니 연습곡’과 12개의 ‘초월적 연습곡’에 잘 나타난다. 그야말로 고난도 기교의 결정판이라고 할만하다.
리스트는 실력도 최고였지만 성품도 매우 좋았다. 워낙 대단한 수퍼스타였기에 자칫 차갑고 독선적이었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는 너그럽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도왔다. 바그너가 혁명의 주모자로 지명 수배를 당했을 때 그의 망명을 돕고 재정적 도움을 준 것도 리스트였으며, 안하무인인 바그너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천재라서 그렇다며 그를 감싸주었다. 또 베를리오즈처럼 훌륭한 음악가의 진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심지어 음악적 견해가 달랐던 슈만 부부가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음에도 리스트는 그들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한때 절친이었지만 예민하고 까다로운 쇼팽이 성격 차로 그를 멀리하려고 할 때도 먼저 다가가서 따뜻한 응원과 칭송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언제나 리스트였다.
성품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 궂은일은 그가 도맡아 하곤 했다. 1845년 베토벤 탄생 75주년을 맞았을 때, 10년 전부터 조직된 행사 준비 위원회가 너무 무능해 축제 자체가 좌초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서로 남에게 책임만 미루고 있을 때 리스트가 모든 것을 떠맡아 난국을 수습했다.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구할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기꺼이 자처했다. 헝가리 태생이긴 하지만 독일어권 국경 지역에서 나고 자라서 헝가리어를 전혀 하지 못했는데도 고국 헝가리에서 다뉴브강의 범람으로 수도 부다페스트가 침수될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자선 공연을 열어 24000굴덴의 거금을 기부했다.
고국 헝가리 침수 위기 땐 자선공연
오늘날 사람들은 리스트를 경이로운 외모와 고난도 테크닉, 그리고 뛰어난 쇼맨십을 모두 갖춘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기억하지만 실제로 그의 75년 인생에서 연주자로 살았던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그는 최절정기였던 35세의 나이에 은퇴 선언을 하고 화려했던 무대에서 내려왔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리스트가 정착한 도시는 괴테와 쉴러의 도시인 바이마르였다. 그곳에서 그는 바이마르 궁정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아 지휘 활동도 하고, 그동안 연주 일정에 쫓겨 맘껏 할 수 없었던 작곡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힘을 쏟은 것은 교육이었다. 배움을 원하는 피아니스트는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여 무료로 가르쳤다. 아마도 자신이 가난해서 배움에 목말랐던 시절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 중년이 된 리스트에게는 불행한 일이 겹쳐서 일어났다. 여생을 같이 하고 싶었던 카롤리네 공녀와의 결혼이 끝내 무산되었고 20대의 두 자녀가 몇 년 사이에 차례로 유명을 달리했다. 현실의 불행이 어린 시절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그에게 상기시킨 것인지, 55세의 리스트는 사제가 되어 종교적 사명을 실천하는 청빈한 성직자로 20년을 살았다.
리스트의 삶은 우리에게 중요한 인생의 이치를 보여준다. 일단 잘 생기면 성공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 그러니 외모에 신경을 쓴다거나 돈을 투자한다고 누군가를 타박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외모가 출중하면 자칫 그것이 전부인 양 오해를 받기 쉽다는 것. 리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혹시 외모가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보겠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실력만으로 평가받을 터이니 그것도 그리 나쁜 것 만은 아닐 듯싶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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