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가 월미도에서 저지른 과오... 그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답사 여행객)]
▲ 맥아더(가운데). |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인천상륙작전은 한 편의 장대한 스펙터클이다. 261척의 함정과 7만여 병력과 수백 대의 항공기를 엮어 거대한 망토를 직조했다. 검은 망토는 경기만으로 좁혀 들어가면서 거대한 쓰나미로 돌변해 단번에 인천을 삼켜버렸다. 육지로 치고 올라선 세계 최강국의 군대는 거침없이 적을 격파하고는 한강을 건너 2주 만에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개전 이후 낙동강까지 거친 속도로 밀어붙여 최종 승리를 거머쥘 듯 낙동강 전선에 마지막 힘을 쏟아붓던 인민군은 단칼에 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이미 쉼표 없는 전투와 둔탁해진 보급으로 속병이 들어있던 인민군은 일순간에 기세가 꺾였다. 밀리기만 하던 국군과 미군은 스타팅 블록을 차고 나간 단거리 선수처럼 인천 상륙 한 달 만에 압록강까지 질주했다. 전쟁사와 군사사에 빛나는 상륙작전으로 기록됐다.
긴박한 상륙작전의 최전선에서 거대한 상륙군을 총지휘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계급장보다 멋진 라이방으로 시선을 가리고는 뚜벅뚜벅 걸어서 상륙했다. 싯누런 인천 앞바다는 그에게 레드카펫이었고 그는 대한민국의 영웅이자 구세주가 됐다. 지금도 그의 동상은 자유라는 이름의 공원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첫 폭격 목표였던 월미도를 바라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승만의 대한민국이 김일성의 북한의 남침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한 단원을 채우며 지금도 소위 안보교육의 한 단락을 차지하고 있다.
월미도는 맥아더의 자유공원에서 빤히 보인다. 걸어서 30분.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 언덕길로 내려가면 인천역, 역의 남쪽을 돌아가면 인천항 8부두다. 여기서 바다 쪽으로 가면 월미산, 곧 월미도다. 땅이 솟으니 산이고 바닷물에 잠기니 섬이다.
월미산 정상에서 서면 인천상륙작전 지도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 군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인천에 상륙하려면 월미도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게 금방 눈에 들어온다. 월미산의 서북 해안은 인천상륙작전에서 녹색해안이란 명칭이 주어졌고, 자유공원 북쪽 해안인 만석동 일대는 적색해안, 남쪽의 연안부두 지역은 청색해안이라 불렸다. 인천의 내항은 황색해안이었다.
▲ 월미도 원주민희생자 위령비 |
ⓒ 윤태옥 |
지난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3주년이 되는 날 이 위령비 앞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이종호 해군참모총장과 김계환 해병대사령관, 유정복 인천시장이 참석했다. 위령비에 헌화와 분향을 하고 두 현역 장성은 경례로써 추모의 뜻을 표했다.
한국의 상륙군 곧 해군과 해병대의 최고 책임자가 월미도 추모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총지휘했던 맥아더 대신 참석한 모양새로 보인다. 나는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의 총지휘자로서 자신의 과오를 최소한으로 사과하든, 최대한으로 변명하든, 직접 참석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한다.
월미도의 참극
인천상륙작전의 전투는 1950년 9월 10일 월미도 폭격으로 시작했다. 월미도에는 인천항을 바라보는 동쪽에 마을이 있었다. 진지를 구축하고 해안을 경계하는 인민군은 그 반대편인 서북 해안에 있었다.
그날 오전 6시 미군 폭격기 14대가 두 항공모함에서 이륙했다. 이들의 임무는 월미도 동쪽 지역을 집중폭격하는 것이었다. 집중폭격(Saturation Bombing)이란 목표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전부 파괴한다'는 뜻이다. 오전 7시경 4대씩 편대를 이룬 폭격기들이 급강하하면서 월미도에 폭탄을 퍼부었다. 네이팜탄이었다. 거대한 화염이 마을을 삼키고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연기가 걷히자 저공비행으로 로켓포와 기관총을 쏘아댔다. 이들의 목표는 민간인 거주지였다.
오전 7시에 15대가 또 이륙했다. 해안선과 방파제를 따라 기총소사를 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1차 폭격에서 살아남아 뛰쳐나온 사람들을 향해 저공으로 비행하며 무수한 총탄을 퍼부었다. 사람들은 갯벌로 뛰어가 몇 바퀴 굴러서는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조종사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몸에 벌흙을 범벅으로 칠하고는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이렇게 해서 일부는 살아남았다.
한 시간 넘게 잠잠하다가 폭격기 8대가 또 날아 왔다. 허름한 진흙집이나 외양간 창고 등등 남아 있는 작은 건물들을 폭격했다. 이로써 월미도 마을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미군이 사용하던 막사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 7사단을 실은 함선이 월미도 앞바다에 들어온 뒤, 1949년 6월 철수하기 전까지 미군이 사용했던 것이다.
무차별 폭격이란 표적이 누구인지 구분하지 않을 뿐이지, 폭격지역만 폭격한다는 면에서는 대단히 정밀했다. 월미도 마을은 부수적인 피해지역이 아니고 표적이었다. 자신들이 사용하던 막사는 목표에서 빼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목표를 하달한 작전상황실에서 보면 완벽한 폭격이었다.
▲ 월미도 폭격 |
ⓒ 진실화해위원회 |
▲ 월미도 폭격 후 |
ⓒ 진실화해위원회 |
▲ 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민간피해 |
ⓒ 이은영 |
상륙 후에는 미군이 월미도를 차지했다. 한 주민이 아버지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몰래 들어가 보니 미군 중장비가 무너진 흙벽과 마을의 밭을 깡그리 밀고는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마을 곳곳에 가매장을 했던 시신들은 중장비의 캐터필러가 밀고 고르고 뭉갰으니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됐다. 산 사람은 죽고 죽은 시신은 사라졌다.
당시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의 증언과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 주민으로 파악된 희생자는 1백여 명이다. 주민 이외의 인민군이 야간 참호공사에 동원한 외지의 노무자도 상당수가 죽었다. 민간인 거주지이고 민간인이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아무런 경고도 없이 폭격으로 쓸어버린 것이다. 그 흔한 '삐라'도 뿌리지 않았다.
상륙작전을 위해 이들을 경고 없이 폭격하는 게 필수적이었을까. 이들에게 대피하라는 '삐라'라도 뿌렸거나, 이들을 죽이거나 마을을 파괴하지 않았으면 인천상륙작전이 실패했으리라는 증거나 논리는 있을까.
그곳이 적군 지역이라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수긍할 수 없다. 이 지역은 엄연히 미국이 유엔을 통해 정해준 38선 이남의 대한민국 영토요, 국민이었다. 맥아더는 자신들이 공산주의의 침략에서 구하겠다고 한 국민이 아닌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7월 4일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관련해 현재 본인의 작전통제 하에 있는 군대에 의해 억류되거나 권력 내에 들어온 북한군의 인원과 기타 북한 사람들은 문명국가들이 적용하고 승인한 인도주의의 원칙에 따라 대우받을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그는 "여러 협약들의 인도적 원칙, 특히 1949년 제네바협약 제3조를 지침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네바협약 공통 제3조는 전시에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사람을 "적대행위에 능동적으로 참가하지 않은 자"로 규정함으로써, 기존 국제법상의 피보호인 범위를 광범위하게 확장시킨 전시 민간인 보호 조항이다.
그는 국제법을 위반했고 자신 공언도 위반했다. 인질범이 인질극을 벌인다고 인질부터 정조준해서 먼저 죽인 셈이다. 우발적으로 인질도 피해를 입었다가 아니라 정확하게 인질을 표적으로 한 의도된 살상이다. 인질로 잡힌 사람들은 범행의 도구인 인질이 됐으니 공범 내지 종범의 죄라도 묻자는 것인가.
월미도 주민이 아닌 인민군 참호 공사에 동원된 노무자들은 적군인가. 일부는 인민군에 자발적으로 충성한 '적'이라 하더라도 나머지는 끌려온 게 분명한 노무자들이다. 두 부류가 섞여 있으면 구별해야 한다. 옆에 있었다고 폭살시키는 것은 학살이다. 인민군 진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지역이니 인질범의 대치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전쟁이었다고? 전쟁에도 규범이 있다. 학살은 학살일 뿐이다.
여기까지가 인천상륙작전에 의한 월미도의 참극이다. 맥아더는 자유공원에서 내려와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위령비 앞에서 사죄할 일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영웅담이 아니라 전쟁범죄 또는 과실에 대해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월미도 사람들의 억울한 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 대한민국이 전면에 나섰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살아남은 주민들은 급한 대로 월미도 입구의 빈집들을 찾아 들었다. 얼마 후에 월미도가 빤히 바라보이는 얼음창고(지금의 제8부두 부근) 주변에 판잣집을 짓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미군에게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이들은 1952년 처음으로 인천시장에게 진정서를 냈다. 인천시장은 지금은 미군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걱정하지 마라, 미군이 나가면 다시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미군이라는 장벽에 꽉 막혔으니 시장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판잣집은 조금씩 불어났다. 아이들도 태어났다. 1960년대에는 주변의 갯벌을 매립하면서 월미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닌 육지가 됐다. 1963년 인천시장에게 다시 진정서를 냈다. 이때도 미군이 나가면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드디어 1971년 7월 미군이 떠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 해군이 들어왔다. 여전히 귀향은 막막했다. 1980년대 들어 개발이란 바람이 불어왔다. 판자촌의 원주민들은 일부 흩어져 갔다. 1989년에는 월미도 서해안 매립지에 문화의 거리가 생겨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인천시가 월미공원을 조성했다. 자신들의 고향마을은 미군기지에서 한국군 기지로, 이제는 공공의 공원이 돼 버린 것이다.
▲ 한인덕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 |
ⓒ 윤태옥 |
주민들은 하나하나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사람들은 2004년부터 월미공원 입구에 천막을 세우고 농성을 시작했다. 2005년 월미도 주민에게 시집 온 한인덕이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한인덕은 생업을 하면서 월미도 관련 자료들을 부지런히 찾아 모았다. 이 과정에서 국방부가 2001년 월미도 마을의 토지를 인천시에 팔아버렸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국방부는 월미도에 소유자가 불분명한 땅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땅 주인을 찾지 않고 국유재산으로 등록했었고, 해군은 철수하면서 인천시에 팔아버린 것이다. 주민들은 또 한번의 분노에 가슴을 쳤다.
월미도 마을은 원래 동쪽 해안(지금의 CNG 충전소 부근)에 있었다. 이 마을은 1904년 동쪽 해안의 남쪽, 지금의 제6부두 부근으로 대토를 받아 이주했다. 주민들은 '묵은마을'이라고 불렀다. 묵은마을은 1942년 또다시 대토를 받아 이주했는데 그게 바로 미군 폭격에 사라진 그 자리였다. 일제강점기에 두 번이나 집단이주를 했지만 대토라도 주어졌다. 그러나 동맹국 군대는 마을을 폭격해 주민들을 죽이고 집을 파괴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조국 대한민국은 토지를 법적으로도 완벽한 인천시 소유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에게 과연 한국전쟁은, 미군은, 대한민국은 어떤 존재일까. 15년 동안 농성을 한 끝에 2020년, 월미도 폭격 70년이 지나서야 인천시가 '월미도원주민 생활안정지원 조례'를 만들어 지원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위령비도 세웠다. 2023년 9월 처음으로 국가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헌화하고 분향도 했다.
그러나 귀향 문제는 진척이 없다. 전쟁통에 이미 쏟아진 물이 됐다면 전쟁 후라도 제대로 추슬러야 하지 않을까. 해방과 전쟁으로 취약한 국가여서 그랬다면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된 지금은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맥아더는 과연 영웅인가
맥아더가 이들에게는 영웅일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도 영웅이란 말은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큰 업적이 있어도 작은 사건 하나로 명예가 추락하는 것을 종종 보지 않는가. 인천상륙작전을 군사작전으로 평가하면 지휘관으로서 맥아더의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맥아더를 보면 인천상륙만의 후한 평가도 어렵다.
맥아더는 인천에 이어 1950년 10월 원산에 또 하나의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디데이는 10월 20일. 그러나 미해병 1사단은 디데이에서 한참 뒤늦게 10월 25일에야 원산에 상륙하기 시작해 28일 완료했다. 미7사단은 원산 동북방의 이원으로 10월 29일 상륙했으나 일부 부대는 해상에서 3주나 대기하다가 11월 9일에 상륙해야 했다.
적군의 저항이 있어서가 아니다. 상륙군이 인천에서처럼 멋지게 돌격상륙을 한 것이 아니라 상륙작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객선에서 하선하듯 행정상륙을 하는 것에 그쳤다. 10월 1일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한 국군이 디데이 시점에 이미 원산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전선에서 두 개 사단을 빼내서는, 하릴없이 해상에 머물다가 그냥 하선했으니 기회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북진이라는 유엔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으면 지휘관 문책을 피할 수 없는 작전의 실패였다. 문책이 아니라 이적행위로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맥아더의 과오는 또 있었다. 북진을 하는데 38선을 돌파할 것인지를 놓고 한국과 미국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미국은 약간 신중한 편이었다. 중국은 38선을 넘으면 참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38선 돌파는 군사적인 이슈와 맞물린 대단히 예민한 국제정치적 이슈였다. 이승만의 명령으로 국군 3사단이 먼저 양양에서 38선을 돌파했다. 이어 미국도 같은 결정을 내리고 유엔군이 뒤이어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책임자인 맥아더는 새로운 상황에 대해 군사적으로 적절히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에는 개입 시기를 놓쳐 참전하지 않는다고 오판했다. 중국군 포로를 잡고서도 참전 규모는 소규모라 별것 아니라고 판단했다. '운산의 비극'을 당하고도 중국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고도 맥아더는 미군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에는 고향에서 맞을 것이라면서 대대적인 공세를 명령했다. 그의 명령으로 또다시 중국군의 매복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터키여단의 비극, 군우리-순천에서 벌어진 인디언 태형, 장진호의 비참한 철수가 직접적인 결과다.
▲ 맥아더 동상 |
ⓒ 윤태옥 |
다시 자유공원으로 돌아와서, 다부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영웅이란 말을 생각한다. 전사자가 넘쳐나는데 산 사람을 두고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전선에서 생사를 던지는 장병이 수십 만인데, 저 멀리 후방에서 엘리트 참모들의 조력을 받으며 지휘관 자리에 있던 사람을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게다가 한 번의 큰 승리 다음에는 한 번의 큰 패퇴로 전선이 37도까지 밀렸으니 그 지휘 책임을 어찌할 것인가. 후반의 참패를 보지 않고 전반의 승리만 조명해서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내 상식에는 어긋난다.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좋으나 그것이 영웅찬가로 변질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인물이든, 정치인이든, 군인이든 존경과 지지가 숭배가 되면 상식을 벗어나 극단으로 가는 것을, 우리는 오늘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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