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3등' 마이크론의 도박…'이 없이 잇몸으로' 삼성 제쳤다

이희권 2024. 3. 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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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마이크론 본사. AP=연합뉴스

이번 주 반도체 업계의 최대 화제는 미국 마이크론의 HBM3E 양산 소식이었다. 메모리 반도체 격전지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밀려 점유율 10% 미만인 마이크론이 지난 26일 5세대 HBM3E을 세계 최초로 양산한다고 전격 발표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특히 올해 엔비디아에 납품하기로 했다는 수주 사실까지 스스로 공개했다. 고객사를 직접 언급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로써 마이크론은 메모리 빅3 중 SK하이닉스에 이어 엔비디아의 HBM3E 파트너가 됐다.


만년 3인자의 반란


신재민 기자
마이크론은 삼성전자는 물론 SK하이닉스와 비교해도 매출·생산능력에서 한참 떨어지는 ‘만년 메모리 3인자’였다. 지난해 매출은 155억 달러(약 20조7000억원). 같은 기간 SK하이닉스(32조7657억원)는 물론, 실적이 안 좋았던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의 지난해 4분기 매출(21조 6900억원)보다도 적다.

특히 마이크론은 메모리 빅3 중 유일하게 첨단 D램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마이크론이 미국에서 사용 중인 연구개발(R&D) 전용 EUV를 제외하면 현재 생산 공정에 활용할 수 있는 EUV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사진 ASML

그동안은 3나노미터(㎚·1㎚=10억 분의 1m) 이하 최선단 공정 경쟁에 접어든 시스템 반도체에서 주로 EUV를 써왔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도 EUV 공정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평택과 이천 공장에서 이미 최신형 D램 생산에 EUV 공정을 쓰고 있다. 마이크론이 EUV 장비 없이 HBM3E을 양산하려면 수율 측면에서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생산비용이 크게 치솟는다는 뜻이다.

이에 마이크론도 EUV 도입에 나섰다. 대만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지난해 말부터 대만 타이중 공장에서 본격적인 EUV 공정 적용에 돌입했다. 산자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는 “내년까지 대만과 일본 히로시마 공장에서 EUV를 도입해 D램을 생산할 것”이라 밝혔다.

HBM3E에 베팅하기 위해 ‘안전한’ 시장까지 포기했다. 마이크론은 보급형 AI 반도체용으로 중국 등에서 여전히 많이 팔리는 구형 HBM2E 생산마저 HBM3E 양산을 위해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일본·미국 등에 팹(반도체 공장)이 흩어져 있는 마이크론은 생산 능력에 한계가 있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반도체 업계에선 마이크론이 숱한 한계에도 끝내 10나노 5세대(1b) 공정으로 HBM3E 양산에 돌입한 것에 주목한다. 삼성전자가 올해 양산을 앞둔 HBM3E조차 10나노 4세대(1a) 공정에 머물러 있다.


EUV 없이 들이박았다


불붙은 D램 공정 경쟁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테크인사이츠
반도체 산업 전문가들의 정보를 종합하면, 마이크론의 이번 결정이 마냥 근거 없는 도박은 아니었다. 최근 마이크론은 미국 본사에 위치한 연구소와 일본 연구소에 공정을 번갈아 개발시키는 ‘지그재그’ 전략을 구사해왔다. 반도체 전문 조사기관 테크인사이츠의 최정동 수석부사장은 “미국 연구소가 1·3세대 공정을 연구하면 그 동안 일본 연구소는 2·4세대 공정을 맡는 식”이라며 “지난 5년 사이 개발 시간을 경쟁사 대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2013년 엘피다를 인수한 마이크론은 엘피다의 일본 연구소를 남겨 두고 본사 연구조직과 경쟁을 붙였다. 생산 역량이 흩어져 있다는 약점을 오히려 기회로 뒤바꾼 것이다.
글로벌 HBM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SK하이닉스, 트랜드포스

업계에서는 실제 D램 성능을 좌우하는 집적도 측면에서 마이크론이 확실히 삼성전자를 앞섰다고 단언하긴 어렵다면서도, 적어도 메모리 3사의 선단 공정 기술력 격차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본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EUV 없이 여기까지 왔다면 원가와 수율 등 모든 면에서 큰 손해를 감수하고도 고객사인 엔비디아의 요구에 맞춰 공급한 것”이라며 “그야말로 ‘이 없이 잇몸’으로 들이 박은 셈”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마이크론은 메모리 빅3 중 유일한 미국 회사라는 점에서 기술력을 확보한 마이크론의 상대적 이점은 향후 더 커질 수 있다. 반도체 제조 생태계를 미국 내에 조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미 정부가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


흔들린 메모리 신화...‘반격의 시간’은 올까


삼성전자 서초사옥. 뉴스1
반도체 업계에선 마이크론의 기습에 허를 찔린 삼성전자의 현 주소를 두고 냉정한 평가가 나온다. 기존 D램 제품과 달리 HBM은 고객 맞춤형 제품이다. 공급자 아닌, 고객의 입장에서 설계부터 공정·생산의 공식을 바꿔야 한다. 칩 성능은 물론 HBM 제조의 핵심인 본딩(접합)과 같은 패키징 기술까지 모두 철저히 고객이 요구하는 바에 맞춰야 수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번 도박이 최종적으로 성공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과거였다면 삼성이 질렀을 법한 과감한 승부수를 오히려 마이크론이 먼저 던진 격”이라며 “30년 간 메모리 1위를 지켰던 삼성이 그동안 놓쳤던 게 무엇인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희권 기자 lee.hee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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