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우리가 뉴진스는 아니더라도

2024. 3. 2.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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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걸그룹 ‘뉴진스’로 태어나고 싶다. 민지도 좋고 혜린도 좋고 다니엘도 좋다. 그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뉴진스 중 한 명이면 그걸로 족하다. 신이 정성을 다해 빚어 놓은 듯한 아름다운 얼굴로 무대 위를 종횡무진 누비는 그녀들을 보고 있노라면 구미호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떼기가 어렵다. 한번은 온종일 뉴진스 영상을 시청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뉴진스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뉴진스라는 새로운 종족이 탄생한 건 아닐까. 거울 속 호모 사피엔스의 눈동자가 유난히 씁쓸해 보였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뉴진스로 환생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러니 조금 소박한 다음 생을 꿈꿔보라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별다른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백하건대, 그러한 사람들의 삶을 SNS로 염탐하곤 한다. 건강한 재료로 맛을 낸 음식을 좋은 그릇에 담아 먹는, 고급스러우면서도 단정한 옷을 옷장 가득 걸어둔, 자기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들이 나는 부럽다. 그네들이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보란 듯이 자랑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자랑을 해보려 해도 도무지 자랑할 건더기가 없다. 최근 한 달 동안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봤자 추어탕을 먹으러 갔다가 추어 튀김까지 시킨 일이 전부이니 말이다.

“넌 다른 사람이 뭐가 그렇게 부러워? 난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집도 있고 차도 있고 강아지도 있는 데다가 돈을 벌어 오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못 벌어 와도 괜찮다고 격려해 주는 심성 고운 남편까지 있는 언니가 팔자 좋은 소리를 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내 인생이 싫지만은 않다. 십년 전에 간절하게 꿈꿨던 일들을 얼추 이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대단히 만족스럽지도 않다. 쓸데없이 순박했던 내가 지나치게 소박한 꿈만 꿨기 때문이다. 당시에 바랐던 일을 모두 이뤄낼 줄 알았더라면 ‘로또 일등 당첨’이나 ‘역세권 자가 아파트 보유’와 같은 원대한 꿈도 꿔 볼 걸 그랬다.

언니는 좀처럼 맥을 추리지 못하는 나에게 걸그룹 ‘아이브’의 ‘I AM’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며 위로를 전했다. ‘다른 문을 열어/ 따라갈 필요는 없어/ 넌 너의 길로 난 나의 길로’ 하는 조언으로 시작된 노래는, ‘너는 누군가의 Dreams come true/ 제일 좋은 어느 날의 데자뷰/ 머물고픈 어딘가의 낯선 뷰’라는 긴가민가한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어도/ 차라리 날아올라 그럼 네가/ 지나가는 대로 길이거든’ 하며 본인이 가는 길에 확신을 가지라고 격려했다. 노래를 듣던 나의 눈가가 이내 촉촉해졌다. 아이브도 뉴진스 뺨치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메울 수 없는 인생의 간극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내 글을 즐겨 읽는다는 독자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격지심을 느낀 적이 있다는 뜻밖의 고백을 했다. 과거에 본인과 같은 직업에 종사했던 내가 새로운 길을 개척한 모습이 부러웠단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직장 생활이 치사하고 더러워서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그만둔 건데…. 모아둔 돈도 없어서 여기저기 빈대 붙어 살다가 이제야 겨우 먹고살 만해진 건데…. 그래 봤자 또래보다 벌이도 시원찮단 말이야! 나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지질한 말을 꿀꺽 삼키고서 “저 같은 사람한테 열등감 느낄 필요 전혀 없어요” 하며 있어 보이는 척했다.

하찮게만 여겨왔던 나의 삶이 누군가가 살아가고 싶은 인생의 한 조각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이 말인즉, 그녀가 초라하게 여기는 본인의 삶 역시 누군가 꿈꾸는 인생의 하이라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녀와 다시 대화를 나눌 일은 없겠지만, 그리하여 이러한 마음을 전달할 길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어디선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가 떨었던 허세 따위 모두 잊고 ‘너도 누군가의 Dreams come true’라는 사실만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니 당신도 나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말이다. 우리가 비록 뉴진스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하여 호모 사피엔스까지 되었으니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 아닌가.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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