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를 피하는 재간"…우리가 '남양'을 주목하는 이유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
“있는 그대로”에 충실한 것이 역사학도의 미덕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려 들면 사실 확인의 자세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 엄정한 자세로 사실을 확인하고 확인된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 역사학도의 본분이라고 한다.
“보고 싶은 대로”만 봐서도 “있는 그대로”만 봐서도 제대로 공부가 어렵다. 보고 싶은 마음을 바닥에 깔아놓고 있는 그대로의 파악에 힘을 쓰면서 보고 싶은 대상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것이 학인(學人)의 자세다.
그런데 나는 공부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공부를 통해 “보고 싶어 한” 것을 이제 너무 아낄 것 없이, “있는 그대로” 털어놓으려 한다.
‘근대’의 중간역을 지나며
50년 역사 공부를 정리할 마음으로 〈오랑캐의 역사〉를 썼다. 공부해 온 중국의 대외교섭사를 중국인에게 외부였던 ‘오랑캐’에 중심을 두고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중화중심주의를 넘어선다는 뜻은 만족스럽게 이뤄졌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이 일어났다.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을 넘어 그 사실의 현재에 대한 함의를 찾아내는 데 역사 공부의 진정한 목적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근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인류가 ‘근대세계’에서 ‘근대적 가치관’에 따라 살아온 지 꽤 되었다. 중세 이전, 역사의 대부분 시기와 크게 다른 방식이다.
이 ‘근대’라는 시대가 역사의 종착역일까, 아니면 하나의 중간역일까? “문명의 완성”을 상상하며 “역사의 종말”을 말한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끌리지 않는다. 역사가 이 중간역을 지나 다음 역으로 떠나기 시작했다고 나는 본다.
‘근대’의 의미를 밝힌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그에 접근하는 경로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지난 2년간 “근대화 뒤집기”란 제목으로 일련의 에세이를 쓰며 경로 모색에 나섰다.
출발점의 작업가설은 “근대국가”였다. 국가는 역사를 통해 가장 보편적인 제도의 하나다. 특히 국가의 존재가 체계적 역사서술의 배경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역사서술이 국가를 중심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근대세계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다른 모든 제도를 압도하고 절대화하는 추세가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 ‘근대인’은 근대 이전의 역사를 살피는 데도 국가를 중심에 두기 쉽다. 모든 역사를 국가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국가주의’가 굳어져 왔다. ‘탈-국가’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탈-근대’ 상황에서 국가주의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을 필요를 느낀다.
‘국가’의 발전이 늦은 곳
과연 역사의 어느 국면에서 국가의 역할을 상대화하는 시각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모색하는 중에 ‘남양(南洋)’이 눈에 들어왔다. 제임스 스콧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2009)을 읽으면서였다.
스콧은 동남아 북부 산악지대를 ‘조미아(Zomia)’라 부르며 그곳 주민들이 국가의 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은 태도를 그렸다. 평야지대의 농업집약화와 그에 따른 국가 통제를 피해 산골로 달아나 화전을 일구거나 심지어 문자 사용을 그만두기도 하는 등 근대인이 익숙한 문명의 발전단계론을 벗어나는 온갖 현상이 널리 일어난 사실을 보여준다.
문명의 역사는 수렴과 확산을 거듭해 왔다. 발전단계론은 수렴의 꼭지점만을 연결해서 전체적 변화를 살피는 거시적 결과론이다. 문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지점만이 아니라 굴곡의 모든 양상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꼭지점 아닌 굴곡의 양상이라면 바닥과 경사면인데, 꼭지점의 대칭에 있는 바닥보다 그 사이 경사면에서 더 다양한 인간사회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강력한 국가조직을 발전시킨 곳이 꼭지점, 정치권력이 형성되지 않아 외부세력에게 무기력하게 정복당하는 곳이 바닥으로 나타난다. 그 차이는 생산력 수준에 있다. 정치조직의 발전은 잉여생산의 규모에 걸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 초기 농업혁명에서 근세의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농업이 생산력의 주축이었다. 문명의 꼭지점들은 초기 농업의 발달에 유리한 유라시아대륙 중위도 지역의 ‘농업문명 벨트’를 따라 나타났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1997)에서 설명한 것처럼 여러 문명이 긴 동서축을 따라 나타나 상호작용을 통해 빠른 발전을 이룬 지역이다.
이 벨트의 남북으로 그만큼 발전이 빠르지는 않아도 인간 활동에 꽤 적합한 조건을 가진 지역이 펼쳐져 있다. 남양(南洋)과 북막(北漠)이다. 꼭지점도 아니고 바닥도 아닌, 문명의 경사면 현상들을 풍성하게 보여주는 곳들이다. 스콧이 말하는 “통치를 피하는 재간”, 국가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으로 대하는 자세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곳들이다.
‘남양’과 ‘북막’의 차이
남양에 비해 북막 유목세계의 연구가 활발했던 것은 농업문명 벨트와의 관계가 긴밀하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식물자원을 양성하는 농업과 동물자원을 양성하는 유목 사이 같은 상호보완 관계가 남양 쪽에는 없었다.
언어체계에 그 차이가 확연히 나타난다. 인도양에서 태평양에 걸친 남양 해역에는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 언어들이 널리 자리 잡고 있다. 북막에도 이와 비슷한 광역 언어체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 위에 ‘우랄-알타이(Ural-Altaic) 어족’이 제안되었으나 20세기 중엽 이후 학설로서 힘을 잃었다. 북막은 인접한 농경사회와 접촉을 통해 언어체계의 발전 양상이 복잡했던 반면 남양의 언어체계에는 교란 요인이 적었던 차이다.
유목세력의 향배가 인접한 농경세력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많았고, 그만큼 농업세계의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남양에 관한 기록과 서술은 훨씬 적다가 근세 들어 해상교역의 성장에 따라 늘어났다. 인류사회에서 농업의 비중이 줄어드는 데 따른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농업세계의 우월한 생산력과 군사력 앞에 남양과 북막이 오랫동안 독자적 영역을 지킨 중요한 조건이 기동력에 있었다. 13세기 몽골제국의 군사력이 대륙을 휩쓸고, 그 몽골제국의 힘이 자바 원정에 실패할 때까지 남양의 항해술과 북막의 기마술은 상대적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 중위도 농업문명 세력은 15세기부터 기동력의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15세기 초에 명나라의 정화(鄭和) 함대가 남양을 휩쓸었고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을 위시한 유럽인이 남양 해역에 진출했다. 그때까지 교역의 주체는 남양인이었다. 다른 지역 주민들은 남양인이 더러 가져다주는 향료 등 남양 특산물을 받아먹으며 보물로 여겼다. 경제 발전에 따라 사치품 수요가 늘어나면서 차츰 가지러 오게 되었다. 예컨대 중국에서 14세기까지는 후추가 대단한 귀중품이었으나 15-16세기에 수입이 크게 늘어나 17세기에는 집집마다 쓰는 기본양념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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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목을 에워싼 덤불과 덩굴
동남아 식민화의 주체가 누구였나? 공식적 지배자는 유럽 열강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더 큰 수혜자는 중국인이었다. 남양 특산물은 유럽보다 중국 시장으로 더 많이 수출되었고 그 생산과 유통에도 중국인 이주민이 큰 역할을 맡았다.
인구 압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위키피디아〉 “Demographics of the World” 항목에 따르면 1500-1820년 기간에 서유럽 인구는 약 2.3배, 중국 인구는 약 3,7배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동남아 인구 증가는 1.8배가량이었다.
유럽인이 지구 반대편으로 활동공간을 넓히는 데는 모든 제도적 역량의 동원이 필요했다. 반면 중국인에게는 자연스러운 확장이었다. 이주민을 많이 보낼 수 없던 유럽세력은 많은 역할을 중국인 집단에 맡기게 되었다. 숲을 밖에서 보면 교목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실제 식생(植生, biomass)은 덤불과 덩굴에 더 많이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게다가 중국인은 국내에서부터 덤불과 덩굴 노릇에 익숙했다. 마이클 소니가 푸젠(福建)성 일대의 사회사를 연구한 〈통치를 받는 재간〉(2017)은 스콧의 책(2009)을 패러디한 제목이다. 받는 재간이건 피하는 재간이건 “재간(art)”이라는 점에서 통한다. 교목처럼 버티는 국가에게 정면으로 달려드는 대신 덤불과 덩굴처럼 재주껏 제 살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소니의 관점은 중국과 동남아의 관계를 바라보는 데 큰 시사점을 제공한다. 중국 남해안은 남양과 비슷한 자연조건을 갖고 한화(漢化)가 늦게 진행된 지역이다. 중국인의 남양 진출은 남중국에서 앞서 진행된 내부 식민화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광시(廣西) 지역 개발 과정을 그린 스티븐 마일스의 〈강을 거슬러〉(2017)는 내부 식민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남양의 초기 중국인 이주민은 현지인과 통혼하며 현지에 적응하는 경향이 컸다. 18세기부터 이주 규모가 커지고 본국과 교통이 쉬워지는 데 따라 중국인의 정체성을 굳게 지키는 화교(華僑)사회가 자라나고, 19세기 본국의 위기 심화에 따라 특별한 역할을 맡기에 이른다.
[앞으로 2년간 동남아시아 역사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참고할 연구성과가 근년 역사인류학 분야에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처럼 국가의 역할이 약했던 지역의 역사에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을 세우는 데 전통적 역사학보다 유리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폭넓은 역사서술을 시도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동남아시아 역사에 “남양사”란 이름을 거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뜻입니다. 중국 외에도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끼친 여러 문명권이 있었지만, 최근 수백 년간 중국과의 관계가 가장 큰 비중을 가진 것으로 봅니다. 이 중점 때문에 동남아시아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제한될 수도 있지만, 초점을 분명히 해주는 이득이 더 크리라 생각합니다.
이 연재에는 월간중앙에 연재한 〈오랑캐의 역사〉(2019.11-2022.3) 및 중앙일보에 연재한 〈근대화 뒤집기〉(2022.1-2024.2)와 겹치는 내용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도입부 몇 회는 〈근대화 뒤집기〉 마무리 부분을 손봐서 올리는 내용이 많겠습니다. 〈남양사〉 서술을 온전하게 하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자기 표절’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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