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아파트 이름 짓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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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하철역에서 4㎞가량 떨어져 있다.
지하철역 이름을 달고 있는 아파트들은 역 주변 5㎞ 반경에 14곳 있다.
아파트 이름에 지하철역 이름만 있는 건 아니다.
지하철역 이름보다 더 효과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파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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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하철역에서 4㎞가량 떨어져 있다. 걸어서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흔히 말하는 역세권은 아니다. 그런데 아파트 이름은 지하철역 이름으로 시작한다. 우리 집보다 지하철역에서 더 먼 아파트 단지들도 마찬가지다. ‘진짜’ 역세권과 ‘가짜’ 역세권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지하철역 이름을 달고 있는 아파트들은 역 주변 5㎞ 반경에 14곳 있다.
아파트 이름에 지하철역 이름만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사는 아파트를 얘기하려면 잠시 멈칫하게 된다. 이름이 헷갈려서다. 아파트 이름은 지하철역 이름과 건설사 이름, 아파트 브랜드 이름, 산을 상징하는 이름까지 더해 12글자다. 아파트 이름에는 ‘더포레’가 들어가는데, 주변 아파트들의 이름을 들여다보면 아주 혼란스러워진다. ‘더 퍼스트’ ‘더 포레스트’ ‘에코포레’ ‘아트포레’…. 이쯤 되면 아파트 이름을 짓기 위해선 먼저 영어 사전을 뒤져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아파트 이름 짓기에 패턴도 생겼다. 주변에 강이나 호수가 있으면 ‘리버’나 ‘레이크’가 붙고, 공원이 있으면 ‘파크’ ‘파크뷰’, 산이 있으면 ‘포레’가 들어간다. 학원가에 있으면 ‘에듀’, 중심가에는 ‘센트럴’ 이 붙는다. 지하철역 이름보다 더 효과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파트도 있다. 동네 이름을 단 아파트들이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가 그렇다. ‘서초’ ‘도곡’ ‘대치’ ‘개포’ 등에 있는 아파트들은 당당하게 동네 이름을 아파트 전면에 내세운다. 왠지 아파트 이름만으로 그 위용을 과시하는 것 같다.
최근 한 아파트 무순위 청약에 101만3456명이 몰렸다. 당첨만 되면 ‘로또’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에 단 3가구 모집에 100만명이 넘게 청약을 넣었다. 진짜 로또는 1000원 한 장이면 살 수 있지만, 이 로또는 좀 다르다. 계약금을 내기 위해서는 최소 6700만원이 있어야 한다. 50만명이 넘게 몰린 전용 59㎡의 분양가는 13억2000만원. 계약금만 1억3200만원이 필요하지만 일단 어찌어찌 전세를 놓고 잔금을 치르면 ‘돈방석’에 앉는 거라고 한다. 지난해 12월 같은 평수가 22억원에 거래됐으니 10억원 가까운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 아파트의 이름도 범상치 않다.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다. ‘디에이치’는 ‘The H’로, 현대(Hyundai), 하이엔드(High-end), 하이 소사이어티(High Society)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퍼스티어’는 퍼스트(First)와 티어(Tier)의 합성어라고 한다. 최고와 최상을 뜻하는 온갖 조어들을 조합하면 마침내 수십억짜리 아파트가 완성된다. 길어져만 가는 아파트 이름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미국의 한 아파트 이름에서 특정 단어를 빼니 집값이 올라가더라는 뉴스였다. 그 이름은 ‘트럼프’. 뉴욕 맨해튼의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트럼프 이름을 뺐더니 가격이 9% 올랐다고 한다. 트럼프 이름을 유지한 아파트는 집값이 23% 떨어졌다. ‘트럼프 플레이스’에 살다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차별적 언사에 반발해 건물 이름을 바꾼 이는 “이름보다 숫자만 있는 단조로운 주소가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언젠가 ‘빼기’를 시작할 한국의 아파트를 상상해 본다. 레이크나 파크뷰, 포레가 빠진 아파트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 차라리 가장 잘나갈 때의 집값을 이름에 넣는 게 덜 피곤할지 모른다. 이 아파트는 20억, 저 아파트는 50억. 그럼 모두가 아파트 이름을 외우느라 진땀 흘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노골적으로 구별 짓기를 하고 있다.
심희정 경제부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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