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내 주머니 속의 ‘밤양갱’

2024. 3. 1.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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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모든 걸 ‘뭐 어려울 것 있나’ 하는 자세로 그저 너끈하고 편안하게

‘밤양갱’을 처음 만난 건 SNS에 떠돌던 짧은 편집 영상이었다. 새 싱글 발매에 맞춰 공중파 심야 좌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비비가 곧 세상에 나올 노래 한 소절을 불러보겠다며 가볍게 첫 음을 짚었다. ‘떠나는 길에 네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밤양갱.’ 4분의 3박자 왈츠 리듬에 얹힌 멜로디를 새털처럼 가볍게 짚는, 심지어 무반주로 부른 고작 18초짜리 영상에 금세 마음이 홀렸다. 데뷔곡 ‘비누’에 반한 이후 비비 노래라면 웬만큼 들어왔다고 생각했건만, 이 사람이 이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나 새삼 놀랐다.

비비의 ‘밤양갱’이 음악 차트를 장악했다. 지난 2월 13일 공개된 지 보름여 만에 국내 대부분 음악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새해를 맞이해 날카롭게 벼린 칼을 뽑아 든 화려한 컴백 라인업 사이에서 거둔 결과다. 발매 당시만 해도 발매 날짜와 노래 제목을 보며 참 귀여운 아이디어 정도라고 생각했다.

밸런타인데이인 2월 14일을 기념해 초콜릿을 비롯한 갖은 달짝지근한 것들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을 때 뒷주머니에서 쓱 꺼내든 밤양갱 하나. 적당히 촌스러우면서도 적당히 낯선, 모 제과 브랜드가 배출한 한국 제과계의 스테디셀러 덕분에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먹어본 적 있을 추억의 디저트가 이렇게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구나 싶었다.

노래가 큰 인기를 끌며 성공 원인을 분석하는 말과 글이 쏟아졌다. 가장 많은 이들이 주목한 건 곡을 만든 싱어송라이터 장기하와 비비의 절묘한 합이었다. 세상만사 느긋할 것 같은 장기하와 허튼짓만 해보라며 두 눈을 부릅뜬 비비. 평생 가까울 일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음악에 담긴 서로 다른 색깔과 온도가 기분 좋은 4분의 3박자 왈츠 리듬에 맞춰 두 손을 맞잡고 두둥실 떠올랐다. 사람으로 가득 찬 무도회장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마주 보게 된 두 사람이 어느새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홀 중앙을 미끄러지는 흔한 클리셰가 연상되는 기막힌 호흡이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해도 그 안에 늘 해학 담은 유희 한 조각을 넣는 걸 잊지 않는 장기하의 장기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노래의 첫 소절만 듣고도 장기하 곡인지 눈치챘다는 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밤양갱’이라는 단어가 가진 음운의 매력도 맛있었다. 단어를 이루는 세 글자 모두에 미음이나 이응처럼 동글동글한 받침이 붙어 발음하는 것만으로 통통 튀는 기분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돌아서는 길, 어쩔 수 없이 울적해지는 기분이 싫어 괜히 한번 폴짝거려 보는 엇박자 걸음처럼 그렇게, 밤양갱이 ‘밤양갱’을 계속 수놓았다. 이 모든 걸 ‘그 뭐 어려울 거 있나’ 하는 자세로 그저 너끈하고 편안하게 노래를 소화해 낸 비비의 재능은 타고났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무언가다.

유튜브 콘텐츠 ‘리무진 서비스’에 출연한 비비는 ‘밤양갱’이 장기하의 노래 ‘나란히 나란히’에 대한 답가라고 말했다. 장기하가 프런트맨으로 활약했던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2018년 발표한 앨범 ‘mono’ 수록곡인 이 곡은 ‘밤양갱’ 속 등장하는 남성 화자의 속마음을 담는다. 등에 업어도 보고, 자동차에 태워 달리거나 헬리콥터를 빌려 같이 날아도 다녀보다 달나라로 가는 우주선을 예약하고 있을 때쯤 이미 네가 떠나고 없다는 걸 문득 깨달은 사람. 더 높이, 더 멀리 태워주는 것보다 그냥 나란히 걸을 걸 그랬다는 짙은 후회 위로 내가 먹고 싶었던 건 사실 우리 둘이 나눠 먹던 작고 다디단 밤양갱 하나였다는 미처 전하지 못한 고백이 분분히 날린다. 절대 달콤하지만은 않은, 쌉쌀하게 남기고 가는 노래의 뒷맛이 심상치 않다. 2024년 늦겨울과 초봄은 ‘밤양갱’으로 기억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든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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