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란의 쇼미더컬처] ‘세계’를 만나는 100년 전 풍경
갓 쓴 유생이 상기된 얼굴로 칠판 앞에 서 있다. 등 뒤에 적힌 2차 방정식이 지금이 수학 시간임을 알려준다. 교실 한쪽에 1900년 첫 제작된 ‘대한여지도’가 걸려 있다. 사진은 1902년 한국에 온 이탈리아 영사 카를로 로세티가 당시 관립중학교의 수학 수업을 찍은 것. 두루마기 유생들 사이의 양복 차림 외국인은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로 그는 한국어로 수업할 정도로 언어가 유창했다고 한다.
사진은 현재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모든 길은 역사로 통한다,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3월 31일까지)에서 만날 수 있다. 양국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에선 1884년 조·이 수호통상조약 이후 우리나라의 풍경이 여럿 소개되고 있다. 수학 수업 사진은 로세티가 1904~1905년 발간한 『꼬레아 에 꼬레아니』에 처음 실렸다. 당시 20대 중반의 청년이던 그는 한국인을 가리켜 “그들은 분명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치 너울처럼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사진이 눈에 밟힌 것은 최근 본 일본 영화 ‘오키쿠와 세계’(감독 사카모토 준지)와 대조적으로 다가와서다. 19세기 에도 시대 말기 하층민의 분투와 사랑을 그린 작품에서 분뇨 장수 츄지는 처음으로 ‘세계’라는 단어를 배운다. 몰락한 사무라이는 ‘세계’란 끝이 없는 하늘과도 같은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요새 나라가 어수선한 건 이제 와서 그걸 알아서”라고 덧붙인다. 때는 1858년, 일본이 미국과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해다. 개항과 세계화의 압력이 하루살이 소시민에게도 뻗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렇게 짚어준다.
우리나라에선 그전까지 ‘천하’ ‘만국’ 등의 단어가 들어갔던 지도 이름이 1900년에 이르러 ‘세계전도’로 바뀌어 나온다. 세계가 보편의 생활 언어로 스며들기 시작했단 의미다. 서양 문물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한발 앞서 개념화한 일본과 떠밀려 수용한 조선의 차이는 그 후 역사를 갈랐다. 그럼에도 로세티가 언급한 조선인의 자질은 다른 외국인에게도 인상적이었던 건지 미국 여행가 프랭크 G. 카펜터는 1909년 “아시아 인종 중 가장 특이하고 흥미로운 사람들이며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라는 언급을 남겼다(최근 발간된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서울 사진』 속 논고에서 재인용).
사진전에선 6·25 전쟁 당시 이탈리아가 파견한 68적십자병원의 활약도 눈에 띈다. 이탈리아는 당시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음에도 의료지원 부대를 파견해 3년여 동안 20만 명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 이 같은 우호 관계를 기반으로 최근 양국 간에 첨단기술 및 우주산업 등 협력도 확대되고 있다.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한국이 만나는 세계는 끝없이 넓어지고 다채로워져 왔다. 로마 뿐 아니라 한국 역시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음을 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되새겨본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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