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생의 역작”… 21세기에 전하는 20세기 우리말 창고
윤흥길 지음
문학동네, 각권 400~444쪽, 각권 1만6500원
윤흥길(82) 작가가 대하소설 ‘문신’을 다섯 권으로 완성했다. 2018년 12월 전반부 세 권을 낸 지 5년여 만에 나머지 4·5권을 출간했다. 지난 27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는 “1989년에 서두 부분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이 소설이 시작된 건 사실 35년 전”이라며 “30년 넘었다고 하면 좀 창피해서 그동안 25년 걸렸다, 20년 걸렸다 그렇게 말해왔다”고 말했다.
‘문신’은 문학잡지에 연재되다 두 차례나 잡지 폐간으로 중단됐다. 책 세 권을 출간한 후에는 작가의 건강이 거푸 발목을 잡았다. 그는 “쓰다가 아프고, 쉬면서 치료받고, 웬만큼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쓰기 시작하고, 그러다 또다시 아프고”라고 집필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출판사에서 제 소설을 ‘필생의 역작’이고 ‘21세기 새로운 고전’이라고 소개했는데, ‘필생의 역작’이란 말은 맞다. 모든 힘을 기울여서 얻어낸 작품이라는 건 분명하다. ‘21세기 새로운 고전’이란 말은 쑥스럽고”라고 덧붙였다.
‘문신’은 강제 징용이 한창인 일제 말기를 살아가는 전라도 시골마을 대지주 최씨 집안 이야기다. 일제 수탈을 활용해 부를 쌓은 천석꾼 최명배는 누구보다 먼저 창씨 개명을 하는 등 부역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는 인물. 첫째 아들 부용은 폐결핵에 걸린 좌절한 지식인으로 세상을 냉소한다. 둘째 아들 귀용은 사회주의에 심취해 아버지마저 혐오한다. 맏딸 순금은 약혼자가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 신앙에 의탁한다. 작가는 이 가족들이 같은 시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통과하며 갈등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윤흥길은 전쟁에 나갈 때 청년들이 몸에 문신을 새기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과 징용자들이 아리랑을 개사해서 불렀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아라/또다시 꽃 피는 봄이 오리라”라는 가사의 ‘밟아도 아리랑’이 소설의 모티프가 됐다고 설명했다.
순금은 징집돼 떠나는 남편의 몸에 ‘봄’이라는 글자를 문신한다. 소설은 야만의 시대에 짓밟히면서 죽지만 않기를, 다시 꽃피는 봄이 오기를 바라는 최씨 가족들의 염원과 엇갈린 행보를 묘사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앞서 독자들을 압도하는 것은 문장이다. 거대한 분량이지만 어느 문장도 지루하지 않다.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었던 옛말과 사투리가 가득하고, 해학과 리듬감이 흥건하다.
“낙철이 너, 시방 날 으띃게 보고 그따우 수작질이냐? 지아모리 반쪽바리 악덕 모리배라 헐지라도 그 냥반은 엄연허니 내 아버지고 느그 이모부다!” 같은 생생하고 질펀한 대화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두툼한 겨울 두루마기 차림새 같은 봄날이 찾아왔다. 그렇다고 불청객 자격은 아니었다. 다만, 반가움 반 낯가림 반 어정쩡한 심정으로 최순금은 이른 봄철을 대할 따름이었다” 같은 예스럽지만 지금 시대로서는 되려 참신하게 다가오는 지문들이 읽는 맛을 준다.
윤흥길은 “전라도 사투리와 토속적인 정서를 재현해 내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판소리의 율조를 흉내내기 위해 조사를 많이 생략하고 어순을 바꾸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기로 마음 먹고 썼다. 젊은 작가들이 추구하는 문학적 경향과는 다른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고 설명했다.
‘문신’은 55년 경력의 소설가, ‘장마’ ‘완장’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을 쓴 거장, 평생 한글사전을 끼고 살아온 사전광이 21세기 한국인에게 전해주는 20세기 우리말의 창고처럼 보인다. 어떤 문제로 21세기에 뒤늦게 착륙한 20세기 대하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열광했던 독자들에게는 틀림없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선물이 되겠지만, 젊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생소함 때문에 책장을 덮을 수도 있고, 아날로그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듯 흥분할 수도 있다.
윤흥길은 “한 나라, 한 사회의 문학적 경향이 패션화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반대한다. 대세를 이루는 흐름이 한 나라의 문학 풍토를 석권하고 있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작가 개인의 성향이 다르고 문학관이 다르다면 100인 100색의 소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양각색의 문학이 나오고 읽힐 때, 그 나라의 문학 풍토가 풍요해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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