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철도 지하화? 유권자들이 앞으로 50년은 보게 될 공약”
여야 총선 공약 들여다보니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연일 총선 현장을 찾아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빨간 조끼를 입고 택배 배달원으로 꾸몄다. 정책을 ‘주문’하기만 하면 신속하고 정확하게 ‘배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난 27일에는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한강벨트’를 찾았다.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후보를 상대하는 윤희숙 국민의힘 후보가 출마한 지역이다. 윤 후보는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시작하는 임대차 3법 반대 연설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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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원 방안 부실하고 실현가능성 적은 ‘던지고 보는’ 공약 많아
여당이 공약에 상대적으로 열의…민주당, 공천 갈등에 빛바래
권력다툼만 부각되는 선거 넘어 시민 권리의 우선순위 논쟁해야
」
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기후대응기금 규모를 올해 2조4000억원에서 2027년 5조원으로 확대하고 22대 국회에 기후위기특별위원회를 상설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민의힘 16호 총선 공약이었다. 흔히 진보 이슈인 기후변화 공약에 보수 정당이 어쨌든 숟가락을 얹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지역과 인물 중심으로 치러지는 총선에서 중앙당 차원의 정책 공약은 대통령 선거보다 덜 주목받는다. 그래도 합리적 중도 성향의 무당층(스윙 보터)의 흔들리는 마음을 정책으로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수도권을 비롯해 치열하게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책 공약은 국민의힘이 상대적으로 열성이다. 지난달 18일 ▶부총리급 인구부 신설 ▶아빠 유급 출산휴가 1개월 의무화 ▶육아휴직 급여 상한 150만원에서 210만원으로 인상 등을 골자로 하는 1호 공약인 ‘일·가족 모두 행복’을 낸 이후 꾸준히 16호 공약까지 냈다. 초등학교 늘봄학교 2학기 전면 시행 등 아이 돌봄서비스 확대(2호), 이자소득세가 면제되는 재형재축 재도입과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비과세 한도 상향(3호), 철도 지하화(4호), 간병비 국가 책임 단계적 강화와 경로당·노인복지관 점심 제공 주 7일까지 단계적 확대(6호), 고위험 성범죄자의 거주지를 제한하는 ‘한국형 제시카법’ 제정(10호), 예비부부·갓결혼부부 대상의 주택 구입용 디딤돌 대출과 전세용 버팀목 대출의 부부 합산 소득요건 완화(12호) 등이 나왔다.
민주당도 같은 날 저출생 공약 발표
여당이 아빠 출산휴가 의무화 등 저출생 공약을 낸 지난달 18일, 더불어민주당도 저출생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2자녀 출산시 24평, 3자녀 출산하면 33평 공공임대 주택인 ‘보듬주택’을 제공하며 나중에 분양 전환할 수 있다. 결혼하면 소득·자산 등과 무관하게 가구당 10년 만기로 1억원을 대출해주고 출생자녀수에 따라 원리금을 차등 감면해준다. 3자녀를 출산하면 무이자에 원금 전액을 탕감해준다. 저출생 관련 정책을 종합적으로 수립하고 집행하는 ‘인구위기대응부’ 신설도 추진한다. 도심구간 철도 지하화도 약속했다. 지역의 거점 국립대를 서울대 수준으로 키우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양육비 국가 대지급,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도입, 동물복지, 고금리 부담 완화, 근로소득자 세 부담 완화 등 공약 발표가 이어졌지만 당내 공천 파동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반면, 정치인 이준석이 이끄는 개혁신당의 정책 공약은 이슈화에 성공했다.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 경찰관·소방관 지원 여성의 군 복무 의무화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에는 반대했다. 이낙연 전 총리가 공동대표를 맡은 새로운 미래는 ‘한국형 모병제’ 도입에 이어 법률혼과 혈연이 아닌 새로운 가족 구성을 단계적으로 수용하는 ‘돌봄중심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약속했다. 거대 양당의 틈새를 파고들어야 하는 3지대 정당은 정책 공약을 공격적으로 내고 있다.
공약이 계속 나오고 있는 만큼 아직 평가하기엔 좀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아직 재원조달 계획을 포함해 전체 공약을 선관위에 등록하지 않은 만큼 더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실 민생토론회 “총선용” 비판
여당의 공식적인 정책 공약은 아니지만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실이 잇따라 민생토론회를 열어 발표하는 일련의 정책도 주목받았다. 야당에서 “총선용”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걸 보면 넓은 범주의 여당 공약으로 볼 여지가 있다. 지방 그린벨트 규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의대 증원도 국민 공감대가 큰 이슈를 던졌다는 점에서 총선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현안이다.
정당의 총선 공약 자체도 뜯어봐야겠지만 유권자들은 공약에서 정당의 태도와 메시지를 읽는다고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분석했다. 정책은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2012년 총선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명과 당 색깔을 싹 바꾸고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까지 수용했어요. 유권자들이 읽은 박근혜의 메시지는 ‘나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다. 개방적인 사람이다. 변화하겠다’가 아니었을까요.”
문제는 재원 조달 방안이나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일단 ‘던져놓고 보는’ 공약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간병비 국가 책임 강화와 경로당 점심 제공 확대 등이 그랬다. 실현과정이 쉽지 않거나 재정 부담이 큰 공약에는 ‘단계적’이라는 표현을 슬그머니 집어넣어 ‘도피처’를 마련했지만 그렇다고 정책 신뢰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 특히 여야가 동시에 내놓은 철도 지하화 공약은 정책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심구간 철도 지하화 비용을 80조원으로 추산(민주당)하면서 여야 모두 민자 유치를 재원 조달 방안으로 내걸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철도지하화 공약은 앞으로 50년 정도는 유권자들이 계속해서 살아생전에 죽기 전까지 보게 될 공약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당의 공약 자체가 덜 주목받는 현실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정치학자 박상훈(국회 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공약은 정당을 책임 정치에 구속시킬 수 있는 시민의 강력한 무기이자 권리인데도 관심을 덜 받는 것은 정당이 시민을 무권리 상태로 만든 것”이라며 “현대 민주주의는 돌봄이나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등 시민의 다양한 권리의 우선순위를 선거를 통해 정하는데 지금은 전체적으로 누가 누구를 쫓아내느냐는 권력투쟁의 모습만 부각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공약을 둘러싸고 이성적인 토론과 논쟁이 없는 점도 아쉬워했다. 그는 지금의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는 총선 공약은 “우리도 공약을 내기는 했다고 면피하려는 ‘알리바이 공약’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 분열, 반사이익, 중도확장이 총선 승패 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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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불평등』의 저자 최병천
최병천(사진)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신간 『이기는 정치학』에서 현재와 같은 양당제가 본격화한 2004년 총선 이후 지금까지 5번의 총선에서 분열, 반사이익, 중도확장이 승패를 가른 3대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최 소장은 2022년 『좋은 불평등』에서 소득주도 성장과 같은 ‘운동권 경제학’을 비판해 주목받았다.
민주당은 2004년, 2016년, 2020년 총선에서 이겼다. 2004년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반사이익을 봤고, 2016년은 상대방의 분열과 반사이익, 문재인-김종인 비대위의 과감한 중도확장이 결합된 결과라고 했다. 2020년 총선도 세 요인이 다 작용했는데 K방역에 대한 자유한국당(현재 국힘 계열)의 반대와 외신의 찬사로 ‘국뽕 선거’가 됐다고 최 소장은 썼다.
국힘 계열이 승리한 2008년은 노무현 정부 심판(반사이익)과 이명박의 중도실용주의(중도 확장) 영향이 컸고 2012년 역시 민주당의 한·미 FTA 폐기 추진(반사이익)과 박근혜 비대위의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중도 확장)가 먹혔다. 최 소장은 정책 공약이 큰 역할을 한 특이한 총선으로 2012년 총선을 꼽았다.
Q : 왜 그런가.
A : “2012년 4월 총선은 이명박 정부 5년차였다.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정권심판론이 강해진다. ‘참패하기 딱 좋은’ 시점이었다. ‘미래권력’인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전면에 나서 중도확장에 성공했다. ‘민주당스러운 정책’으로 민주당의 중도표를 가져갔다. ‘줄푸세’의 박근혜가 ‘경제민주화’ 박근혜로 변신했다.”(줄푸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뜻으로 내세웠던 슬로건이다.)
Q : 대통령 선거에 비해 총선에선 정책 공약이 덜 부각되는 것 같다.
A : “정책에 미치는 국회의 영향력이 행정부에 비해 작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이기면 행정부까지 장악하지만 총선에서 이겨도 의회 권력뿐이다. 지방정부까지 공무원은 200만 명이지만 국회는 예산정책처 등 국회 유관기관까지 다 합해도 1만 명이 안 된다. 상근자 숫자가 조직력이고 영향력이다. 그러니 정책 공약의 진실성과 책임성도 떨어진다.”
Q : 그래도 정책을 들여다보는 유권자는 있다.
A : “정책 공약은 정당의 공적인 약속이다. 지도자가 누구냐, 지도자가 신뢰받고 있느냐에 따라 정책 공약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박근혜는 아버지 기일에 ‘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입니다’라는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전략적인 추도사를 남겼다. 실제로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의 각론도 잘 준비돼 있었다.”
Q : 정책 수요자인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나.
A : “보육 등 본인의 삶과 관련된 정책을 보면서 챙길 것은 챙겨라. 좋은 정책에 반응하는 유권자가 많을수록 정당도 정교한 정책을 내놓는다.” 」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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