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의 과학 산책] 언덕을 넘어서
미국의 한 대학에서 미적분학을 강의할 때 이야기이다 100여 명이 수강하는 대형강의였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중간고사는 형식적인 시험 감독 속에 치러졌다. 세세히 감시하기에는 강의실도 너무 컸고, 학생들에 대한 나의 믿음은 더욱 컸다. 부정행위같이 시시한 짓을 할 리가. 시험이 끝나고 채점을 거의 다 마쳤을 때였다. 아주 비슷한 두 답안지가 눈에 띄었다. 정답과 오답이 같은, 전형적인 의심사례였다. 이 경우 권장하는 대응은, 학과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공을 그쪽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일을 조용하게 넘기고 싶었다. 징계위원회에 넘어가는 순간 그 신입생들에게는 평생의 낙인이 남는다. 그래서 다음 수업을 시작하며 짧게 공표하였다. “시험 중 부정행위가 있었다. 한 번의 실수로 오랜 후회를 갖게 하고 싶지는 않다. 수업 후 내게 고백하면 가벼운 벌칙으로 넘어가겠다. 하지만 다음 주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겠다.” 수업이 끝나 손을 씻고 연구실에 갔더니 아홉 명의 학생이 복도에 한 줄로 서 있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넘도록 나는 하나하나의 눈물 섞인 고해성사를 들어야 했다.
모든 사람은 근시안적인 편안함을 향하는 속성이 있다. 이 ‘게으름’은, 언덕에 놓여 있는 공처럼 동작한다. 가장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가고 싶어하는 이치여서, 인공지능 이론에서는 ‘경사 하강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도달해야 할 우리의 오아시스는 종종 언덕 너머에 있다. 그런데, 한 번 좁고 컴컴한 골짜기에 멈춰버린 공은 더 이상 내려갈 경사를 찾지 못하고 멈춰만 있게 되기 쉽다. 이때 교육이라는 자산이 빛을 발하게 된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눈속임이나 거짓말 같은 당장의 편안함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지금 당장은 고단하더라도, 믿음과 성실로 언덕을 넘고 나면 눈앞에 장관이 펼쳐질 것이라는 조언이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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