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김정은의 전쟁, 푸틴의 전쟁
1970년대 후반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Pravda)는 애완동물에게 육류를 먹이지 말자는 이색적인 캠페인 기사를 게재했다. 미국 전문가들은 이를 소련 정권의 프로퍼갠더로 해석했다. 개와 고양이에게도 고기를 먹일 만큼 소련은 이제 소비에서도 미국을 따라잡았음을 선전하려고 거짓 기사를 썼다고 보았다. 하지만 기사가 허구만은 아니었다. 육류값이 너무 싸다 보니 고기를 사서 애완동물에게 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진실은 감췄다. 육류값이 싼 이유는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 때문이었다. 생필품 가격은 일정해야 한다는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소련은 1970년대 말에 국민총소득의 무려 7%를 식품 가격을 낮추는 보조금으로 썼다. 그 결과 불어나는 재정적자와 부족한 투자 재원으로 경제는 망가지고 있었다. 프라브다는 내부의 고통스러운 진실은 감추고 일부 사실만 외부에 드러내어 전체적인 그림을 왜곡하는 교활함을 보였다. 그리고 미국 전문가는 감추어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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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대남 적대와 전쟁론으로
북한 주민들의 남한 동경을 막고
한국 손 묶어 푸틴을 도우려는 듯
북한 사상전, 푸틴의 전쟁과 연결
」
독재자의 권력 기반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전쟁이나 외부의 개입이 임박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재자의 행동과 정책 대부분은 내부를 향한 것이다. 이 내부를 모르면 독재자의 모든 언행을 대외용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김정은 입에서 한국을 초토화하겠다는 말을 내뱉게 했을까. 새해 초부터 서해 NLL에 포격을 감행하게 했을까. 선대 유훈인 남북통일마저 저버리고 적대적 2국가, 나아가 남한 정복까지 들먹이게 했을까.
김정은이 벌이고 있는 내부 사상전이 그 이유다. 5년 전 하노이회담 결렬 후 그가 부르짖은 자력갱생이 사상전의 신호탄이었다. 자력갱생하려면 내부가 단합해야 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시장 활동을 통해 북한 주민 상당수가 남한 문화와 자본주의로 심적인 전향을 했던 상태였다. 상인들은 라벨을 떼고 남한산 제품을 몰래 팔았다. 최고 혼수품인 남한 밥솥을 구하려고 국경을 오가는 밀수업자에게 부탁하는 일도 많았다. 김정일의 말대로 “시장은 자본주의의 본거지”인 동시에 남한 문화의 서식처이기도 했다. 그런데 2020년부터 코로나로 시장 활동이 어려워지자 김정은은 이를 ‘시장, 자본주의, 남한 문화’라는 3종 세트를 타격할 호기로 간주했다. 이 중 주민의 저항이 가장 적을 법한 남한 문화를 거세게 제거하려 했다. 다량의 남한 문화를 유포할 경우, 사형까지 가능하게 만든 ‘반동사상문화 배격법’이 그 시도 중 하나였다.
김정은의 전쟁론은 북한 주민의 남한 동경을 마음에서부터 지우려는 자기 완결적 시도다. 평화통일이 북한의 국시인 이상 남한 문화는 제거가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평화통일하자면서 왜 신통방통한 남한 문화를 배격해야 하냐며 장마당 세대는 마음으로 반발했다. 이에 대응해 북한 정권은 논리적 일관성과 법적 완결성을 갖출 필요를 느꼈다. 남한 문화의 연성권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남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적대국의 문화이니 버려야 하며 이를 어긴다면 엄히 처벌한다고 위협하는 강경책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더해 전쟁을 언급하며 포까지 쏘아대야 북한 주민의 마음속에 남한이 정말 적국임을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만큼 북한 내 사상전은 치열하며 김정은의 위기감은 고조돼 있다.
김정은의 전쟁 허풍에는 푸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의 협박이 먹힐 경우, 가장 큰 혜택을 볼 사람은 푸틴이다. 한국은 민주국가 중 우크라이나에 대량의 포탄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런 한국이 전쟁 대비를 위해 포탄을 비축하려 한다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포탄 지원 가능성은 사라진다. 러시아로서는 현재 자국에 유리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변수 하나를 제거하는 셈이다. 미국도 북한을 감시하느라 우크라이나에 관심을 집중하지 못한다. 이렇듯 김정은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면 한국의 손은 묶이고 미국의 눈은 분산돼 결국 러시아에 큰 도움이 된다.
김정은의 언행은 푸틴의 요청일까. 이심전심일까. 같은 시기 러시아의 외교관들도 한국 외교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언급하고 경고를 날리는 동시에 기대를 표시하며 한국이 현 상태를 유지하도록 유도, 압박했다. 북·러가 긴밀히 조율하고 같이 움직인다는 생각은 기우인가. 북·러 간 어떤 거래가 있고 어떤 거래를 기대하길래 김정은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을까.
김정은의 전쟁은 대내 사상전, 푸틴의 전쟁은 대외 열전(熱戰)이지만 이 둘은 얽혀 있다. 우리는 북한의 내부를 관통할 뿐 아니라 그 내부와 지정학이 접하는 지점을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 김정은의 말만 듣고 북한의 문건만 읽는 수준이 아니라 그가 감추려는 진실을 통찰하는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 우리 정부는 북·러 밀착의 결과 북한에 군사기술이 제공될 때는 한국의 우크라이나 정책에 중요한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러시아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알려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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