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기계보다 나은 삶이길 바라며
길을 걷다 보니 묵직한 짐을 지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스님들이 제법 눈에 띈다. 해제가 되어서 그런가 보다. 불교에서는 정월 보름이면 동안거 수행에 들어갔던 스님들이 마음공부를 마치고 산문 밖으로 나온다. 결코 짧지 않은 겨울철 석 달 동안 가부좌를 틀고 8시간 내지 10시간씩 앉아 있다가 이제야 겨우 제대로 다리를 푸는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만행을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정월 보름날 사시(巳時·오전 9시~11시)가 되면 산중의 모든 스님이 길 떠나기 전 법당 한자리에 모인다. 이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큰스님의 법문을 들은 뒤 길을 나서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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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시작하려 번뇌·미련 태워
챗봇, 사람 마음 헤아릴 수 없어
기계가 탐·진·치 수행할 수야
」
정월 대보름날이면 환한 불빛과 함께 떠오르는 몇 가지 풍경들이 있다. 어릴 적 고향 마을 풍경이다. 나는 특히 쥐불놀이가 재밌었다. 쥐불놀이는 구경하는 것도 즐겁고, 돌리는 손맛도 무지 신난다. 논바닥에서 달집 태우는 모습도 뭔가 후련한 게 신기했다.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어딘가에 대고 빌던 어머니 모습도 정겹게 떠오른다. 아 참! 동무들과 함께 집집마다 찰밥 얻으러 다닌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정월 대보름의 휘영청 밝은 달빛과 논밭 복판에서 환하게 타들어가던 달집, 빙글빙글 돌아가는 쥐불놀이. 그러고 보면 정월 보름에는 늘 이렇게 빛과 함께였던 것 같다. 스님들이 동안거 석 달 동안 번뇌를 태우는 것처럼, 마을에서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뭔가를 태워 없앴다. 지금이야 산불이 위험하다며 금지령을 내렸지만, 어릴 적 어른들에게 여쭤보면 이렇게 불을 놓으며 뭔가를 태워 없애야만 한 해 농사도 잘되고 일도 잘 풀린다고 했다. 다시 시작하려면 뭐든 태워 없애야 하나 보다. 번뇌도 태우고 미련도 태우고. 지나간 못난 일들은 다 태우고, 잊고 새로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고향 마을 얘기를 꺼내서인가. 유년 시절의 마을 길을 떠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우리 마을은 어두운 골목길이라는 게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고향 집도 큰길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웃집들도 담 넘어 잘 넘겨다보였다. 꼬불거리는 논두렁 밭두렁도 훤히 보였다. 골목이 없진 않았을 텐데, 외진 골목을 경험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다. 어쩌면 겁이 너무 많아서 혼자 다니지 못한 탓에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러다 어떤 인연으로 큰 도시에 나가 살아보니 웬 길이 그리도 많은지, 차 다니는 무서운 큰길부터 뒷골목의 좁은 길, 막다른 길까지 참 많았다. 친척 집에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이다. 세상과 동떨어진 출가자들에게도 전 세계의 모든 정보가 이 작은 휴대전화 하나에 들어온다. 지인이나 친척 집 찾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원하는 맛집이나 핫플레이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올리는 정보 또한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따지고 보면 작은 휴대전화 하나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SNS를 통해 누구든지 자신을 알릴 수도 있다. 참선을 배울 수도 있고, 불교 교리를 배울 수도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전해지는 연결망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발전을 하다 하다 이젠 AI 시대라고 한다. 이웃 나라에선 목탁 치는 로봇도 나왔다. 어느 절에선 대종도 사람이 아닌 기계가 울린다. 이런 정도는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목탁과 대종 치는 일은 단순 작업군으로 분류되며, 사람의 질문에 최적의 답을 찾아주는 챗봇(챗 GPT)은 글을 쓰고 작곡을 하고 그림까지 그려주는 등 문학과 예술의 영역까지 진입하고 있다.
휴먼과 AI의 공존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나아가서는 종교, 철학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분석철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데이비드 차머스는 2022년 ‘현실+이론’을 발표하면서 물리적 현실과 가상의 현실이 분리될 수 없다고 했다. 인생을 꿈으로 본 불교적 입장과도 연결된다.
25년 전,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하여 엄청난 흥행과 이야깃거리를 생산했던 SF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는 AI라는 개념이 전무했고, 자유로운 영화적 상상력에서만 펼쳐질 수 있는 가상현실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상상의 스토리가 이제는 현실이 되어간다. 정월 대보름의 정겨움과 소망도 디지털화된 세상에선 다른 형태로 바뀌겠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줄 수 없는 AI의 불완전은 어쩌면 수행자들의 몫일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답을 제시하는 챗봇이라 해도 인간의 마음까지 헤아리기는 어려울 테고, 기계가 탐·진·치의 번뇌까지 수행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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