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북클럽 3기] 잘 들어보세요, 2월은 단념하기 좋은 달입니다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편집자말>
[김지은 기자]
지난달에 우연히 난다출판사 '시의적절' 시리즈의 첫 책, <읽을, 거리>를 봤다. 책을 보다 이 시리즈의 기획이 너무 좋다는 생각에 책을 뒤적여 편집자를 살피고 관련 기사를 검색했다.
'시의적절'은 열두 명의 시인이 열두 달 중 한 달씩을 맡아 릴레이로 써 가는 시리즈다. '시詩의 적절함으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가 이 시리즈의 모토다.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기, 편지, 에세이, 인터뷰 등이 매일 한 꼭지씩 있어 '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날짜별로 매일 하나씩 읽는 재미도 있다. 오늘 나에게 선물을 주는 기분이랄까.
▲ 선릉과 정릉 시의적절 시리즈 두 번째 책, <선릉과 정릉>의 책 표지. |
ⓒ 난다출판사 |
1월의 책 <읽을, 거리>를 읽은 후 이 시리즈는 모두 사야겠단 생각을 했다. 2월이 되자마자 2월의 책인 전욱진 시인의 <선릉과 정릉>을 구매했다. 그러나 사실은 살지 말지 살짝 고민했다. <읽을, 거리>보다 시의 비중이 높았던 까닭이다. 구매를 결정하려 급하게 읽은 시들도 별 감응이 없다. 머릿속의 내가 둘로 나뉘어 사야 하는 이유, 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길래 머리가 아파 생각을 자르고 처음 결심대로 구매했다.
집에 와 식탁에 앉아 다시 책을 펼쳤다. 아뿔싸. 책의 머리말 격인 작가의 말도 '시'다. 작가의 말도 시로 대신하다니. 흠칫 놀랐지만 멈추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제목은 <어두운 포옹>
'단념하기 좋은 달이라고/ 기지개 켜며 혼잣말할 때/ 누군가는 그걸 체념이라 했다.//... '
씨익. 웃음이 났다. 2월을 단념하기 좋은 달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마음이 시원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2월을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은 달이라 말하는데 단념하기 좋은 달이라니. 뭔가 통쾌하다. 맞지 않는가. 1월에 세운 계획이 아니다, 싶으면 서둘러 단념하고 방향을 틀기 좋은 달이 바로 2월이다. 동시에 그렇게 말하는 시인 옆에서 '그건 체념이지'라고 말하는 얄미운 사람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내 몫의 빛을 전부 잃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있습니다. 실수로 그만 하수구 같은 데에 빠뜨렸을 수도 있고요. 으르고 협박하는 누군가에 순순히 내줬을 수도 있지요. 아니면 그저 스스로 깜깜하고 싶어, 어디 멀리 내다 버리고 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빛을 잃고 난 몸안은 정말로 어둑어둑해져선, 느른해진 상태로 침대 위에 곧장 쓰러지고 말아요. (~) 그런 순간에 나는 어떻게든 기어서 음악 밑으로 향하는 사람입니다. (~) 곧 좁은 방안을 그득하니 채우는 선율. 그 음의 높낮이를 따라 사람의 마음도 넘실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소진했던 빛이 귀에서부터 시작해 안쪽으로 천천히 채워지는 느낌을 받아들입니다.(p33)"
'나는 그럴 때 어떤 사람이지?' 하고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주변에도 묻고 싶다. '너는 그런 순간에 너 자신을 뭘로 채우니?' 하고. 그러나 그 전에, 모두에게 '내 몫의 빛'이 있다는 시인의 그 전제가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럽다.
듀크 조던을 소개한 <문제 없습니다>라는 꼭지도 기억에 남는다. 1940년대에 재즈의 새로운 장을 연 피아니스트 듀크 조던은 유명 뮤지션들과 작업하며 이름을 날렸지만 재즈의 입지가 좁아지며 연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혼을 당하고 영화에 쓰일 음악을 만들고도 돈을 받지 못했다.
"드럼의 심벌소리와 함께 베이스 리프가 들렸고 맑고 산뜻한 피아노 소리가 이어 흘러나왔습니다. 듀크 조던 트리오의 <No Problem>. (~) 그 십 년 동안, 노란 차의 운전석에 앉아 거리를 다녔을 그를 떠올렸습니다. 남한테 들으라 한 말이었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내내 다독이며 건넸을 말. NO Problem.(문제없어)."(p75)
나는 지금 이 글을 듀크 조던의 'No probelm'을 들으며 쓰고 있다. 부드럽지만 힘 있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자판을 두드린다. 이 이야기를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를 닦아 빛을 내보려 한다
▲ 인덱스가 빼곡히 붙은 책 인덱스가 빼곡히 붙은 <선릉과 정릉>. 시집에 이렇게 인덱스를 많이 붙일 일인가. |
ⓒ 김지은 |
삶은 자주 엉망이지만 거기엔 내 몫의 아름다움이 아직 남아 있고 그 아름다움은 반드시 예정되어 있다는 말. 차가 어두운 터널에 진입하듯이 사람도 그러한 구간을 통과할 때가 있다는 말. 이런 시인의 따뜻한 말에 기대어 오늘의 나를 닦아 빛을 내보려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빛을 잃지 않기를, 잃은 빛을 채울 힘을 얻기를, 자신에게 빛이 있음을 알기를.
책 뒤 부록에 시인의 플레이 리스트가 '음악들'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깜짝 선물처럼 맨 마지막에 짜잔 등장한다. 시인의 글을 읽으며 함께 음악을 들으면 그 공간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1월의 책 <읽을, 거리>와 2월의 책 <선릉과 정릉>은 꼭 1월, 2월이 아닌 그 어느 때에 읽어도 괜찮은 책이다. 물론 그때 읽으면 가장 좋겠지만, 어느 때에 읽어도 마음을 감응시킬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혹여, 이 책을 읽기 위해 1년 뒤의 1월과 2월을 기약하는 독자들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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