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층 빌딩은 왜 길거리 낙서 패에 점령당했나
[황상호 기자]
▲ NBCLA뉴스에서 오션와이드 프라자에 그려진 그래피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
ⓒ NBC뉴스 갈무리 |
미국 로스앤젤레스(이하 LA) 다운타운에 있는 27층 빌딩, 오션와이드 프라자입니다. 높이 약 207미터로 서울에 있는 63빌딩(250미터)과 견줄 정도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보시다시피 건물 유리창마다 스프레이 캔 낙서인 태그(tag)가 잔뜩 그려져 있다는 것이죠. 알록달록, 지그재그, 정신 없습니다. 대부분 뜻을 알 수 없는 기호이고요. 간혹, 속도를 내라(set the pace)와 아멘(amen)과 같이 해석이 되는 글자도 있네요.
주변에는 지진 등으로 인해 건축물 고도제한이 있어 높은 건물이 거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낙서가 발산하는 날 것의 에너지가 사방에 강렬하게 전파됩니다. LA 한복판, 그것도 호텔과 쇼핑몰을 꿈꾸던 대자본의 상징이, 왜 길거리 낙서 패에게 점령당했을까요?
마천루에 그라피티가 그려진 것은 1월 말부터 2월 초 사이입니다. 처음 몇몇 작가가 빌딩 안으로 들어가 스프레이 캔으로 태깅을 했습니다. 일부는 고층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창가의 좁은 발판만 밟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정말이지, 목숨을 내놓은 묘기같은 작업입니다.
그라피티 작가들은 이렇게 높은 장소를 '헤븐스팟(heaven spot)'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용감함을 과시하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작품을 노출할 수 있죠. 대신, 추락해 사망하면 곧장 '천국(heaven)' 행이라 뜻에서 천국 가는 자리라고 부릅니다.
▲ 초고층 건물에 각종 태그로 도배돼 있다. |
ⓒ NBCLA 뉴스 갈무리 |
작가들이 처음 이곳에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대중의 큰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작가들이 사진과 숏폼 영상을 촬영해 소셜미디어에 올리면서 큰 관심을 불러 모았습니다. 작가들이 페인트통과 롤러를 둘러매고 고층 아파트를 오르는 모습, 도심 야경을 발아래로 두고 낙서하는 장면, 빈 아파트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스테이크를 굽는, 호방하면서도 아찔한 모습이 소셜미디어 영상을 통해 퍼져나갔습니다.
한 작가는 인스타그램에 "나의 무법자들과 먹는 수십만 달러 가치의 스테이크"라며 팔로워를 흥분시켰습니다. 또 다른 작가들은 드론을 이용해 고층 빌딩과 태그가 어우러진 스펙타클한 영상을 제작해 퍼뜨렸고, 또 다른 참가자는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려 패러글라이딩을 타는 모습을 인스타그램 등에 공유했습니다.
▲ 밤에 본 오션와이드 프라자의 모습이다. 뒤로 한진그룹의 빌딩인 윌셔 그랜드 센터가 보인다. |
ⓒ nicksozonov의 인스타그램 |
오션와이드 프라자 빌딩은 미국 프로농구 경기가 열리는 크립토닷컴 아레나와 국제 콘퍼런스가 쉬지 않고 열리는 LA컨벤션센터 바로 앞에 있습니다. LA의 대표적인 노른자 땅입니다. 중국 개발업체가 2015년 첫 삽을 떠, 2018년 외부 공사를 끝냈습니다. 3개 동은 아파트, 나머지는 호텔이나 쇼핑몰로 사용하려고 했죠.
그러다 2019년 자금줄이 막히면서 실내 인테리어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그러는 와중, 개발업체가 빌딩 보안 업체에 관리비도 주지 못하게 되고 손해배상 소송까지 걸리자, 급기야 건물 보안 기능이 마비된 것입니다.
이 틈을 타, 그라피티 작가들이 건물 안으로 침입한 것이죠. 일부 경제단체는 "그라피티는 기물 파손 범죄이며,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다운타운에서 겪은 일입니다"라고 시 정부를 맹비난했습니다.
▲ 그라피티로 뒤덮인 LA 다운타운의 오션와이드 프라자. |
ⓒ 데이비드 권 |
그렇다면, 그라피티 작가들은 왜 다운타운 초고층 빌딩을 노렸을까요? 사실, 빈 건물에 그라피티를 그리는 것은 그라피티 작가의 존재 증명과 같습니다. 축구선수에게 왜 발로 공을 차냐고 묻는 것과 같죠.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른다는 산악인 제프리 노먼의 말과도 같습니다.
이번 작업에 참여한 그라피티 작가 머치(Merch)는 지난 5일 예술 매체인 하이퍼앨러직(HYPERALLEGIC)과 한 인터뷰에서 "플로리다에서 열린 '아트 바젤 마이애미비치 2023'에 참여해 철거 예정인 20층짜리 병원에 태그를 하면서 영감을 얻었어요. 빈 빌딩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LA 버전을 만들고 싶었죠"라고 말했습니다.
LA 전역에 태그가 있어 LA 주민이라면 무조건 볼 수밖에 없는 태그 'HOPESS' 그리는 작가 호프스도 말을 보탰습니다. 호프스는 "외람되는 말이지만, 이 건물은 도심에 버려진 흉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색을 입히는 겁니다. 개발업자가 (자기)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죠"라고 말했습니다.
위법 행위에도 매우 당당하죠? 또 다른 작가 에이커(Aker)는 "이 건물은 수년 동안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소유주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꺼이 무언가를 해야죠"라고 응답했습니다.
LA는 벽화와 스티커, 그라피티 등 거리예술에 우호적인 도시입니다. 도심에서 낙서를 해도 경찰이 바로 체포하지 않습니다. 미국 뉴욕 등 동부에서는 바로 검거될 수 있어, 많은 작가들이 LA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작가들이 처음 이 빌딩에 들어가 그라피티를 그렸을 때도 경찰이 굳이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작가들이 발 딛기도 힘든 고층 난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일부는 패러글라이딩으로 묘기를 부리자 경찰이 나선 겁니다. 사건 발생 후, LA경찰은 작가 20명 정도를 기물 파손과 무단 침입, 절도 등의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20~40대였습니다. 미셸 무어 LA경찰청장은 그라피티로 인해 경찰력이 3000시간 정도 투여된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시의회도 질타에 나섰습니다. LA 시의원은 2월 중순 개발업자에게 낙서를 지우고 보안을 강화하도록 하는 발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캐런 배스 LA시장도 "누가 떨어질까 봐 겁난다. 빨리 폐쇄하지 않으면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거라고 장담한다"고 말했습니다.
▲ 한 사람이 그라피티로 뒤덮인 오션와이드 프라자를 사진 찍고 있다. |
ⓒ 데이비드 권 |
이러는 와중 '그라피티 타워'는 LA 신흥 관광 명소로 떠올랐습니다. 그라피티 애호가뿐만 아니라 여행객과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드론을 띄워 그라피티 촬영을 하려 하자, 이제 경찰이 나서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한 방문객은 지난 14일 NBC 뉴스 인터뷰에서 "뉴스에서 보고 직접 보기 위해 찾아왔어요. 멋지기도 하면서, 나쁜 짓 같아 보이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LA다운 모습이에요. 여기가 바로 미국이고, 이것이 바로 미래의 미국입니다. 미국도 언젠가는 저렇게 돈이 떨어지겠죠"라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LA 출신이자 애리조나 대학교에서 문화, 지리적 관점에서 범죄학을 가르치는 스테파노 블로흐(Stefano Bloch) 교수는 "사람들이 그라피티 작가들이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만큼, 그들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공간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고 논평했습니다.
LA에서는 버려진 공원이나 터널, 수영장 등 온갖 시설물에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습니다. 눈살을 찌푸리는 행위이면서도 하나의 문화 행위로 자리 잡았죠.
한국에도 건설이 중단된 건축물이 꽤 많죠? 만약, 동네 낙서 패들이 몰려다니며 빈 건물에 그림을 그린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요? 예술과 훼손 사이, 여러분께서는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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