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31] 지뢰밭 같은 인생

전병선 2024. 2. 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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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인 목사

지뢰밭. 1975년 봄쯤이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1974년 11월에 중풍으로 누워 계셨던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까. 그때, 1974년 11월 말경 시이모네 집 수돗가에서 혼자 김장배추를 절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 김치를 제대로 담글 수가 있을까?”라고 되뇌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외 며느리인 나는 시이모네 김장배추 절이던 일을 그만두고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그때도 혼자서 손님과 식구들의 식사를 챙기느라 잠도 자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시모와 시누이들이 방 안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시부의 죽음이 마치 나 때문이기라도 한 듯이 나를 원망하는 말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관을 하던 시간에, 내가 쓰러지게 되었다. 그때, 사촌 시누이뻘이 되는 승동교회 권사님이 나를 부축해 마루에 눕히고 내 입에다 김칫국물을 흘려 넣어 주셨다. 연탄가스에 중독이 된 것 같다고 하면서.

그 외의 다른 기억은 없는데, 당시에 두 살이던 작은 아이와 세 살 반이던 큰 아이가 넘어져 있는 내게로 다가와서 낑낑대던 생각이 난다. 그래도 자기들의 어머니라고. 내 편은 내 새끼들뿐이었다.

그해 겨울을 어찌어찌 보내고 봄이 왔는데, 그가 내게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00 구청장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친척인데 우리 결혼식에도 왔던 사람이니 가서 자기 이름을 대면 보험을 하나 들어줄 수도 있다고 하면서. 그래서 거기를 찾아가게 되었다. 당시 나는 보험 세일즈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찾아가서 아무개 집사람이라고 내 소개를 하니 비서가 구청장에게 안내를 해 주었다.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고 보험 이야기를 시작하니, 한눈에 보아도 난처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 구청장실에는 이미 와 있던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차마 말을 못하고 그냥 가려고 나오는데, 이미 와 있던 그 사람이 “제가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조용한 데로 가시지요”하면서 따라 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보험을 들어준다고 하니 그를 따라서 전차를 타고 그가 내리는 곳에서 내려서 그가 안내하는 다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보험을 들겠다던 그의 말과는 다르게 태도가 이상했다. 보험을 들을 것 같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갑자기 돌변한 그가 “지금부터 꼼짝하지 말라”고 나를 협박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놀라고 겁이 났다. 그는 자기가 00 일보 정치부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는 느닷없이 자기의 애인이 되어 달라고 했다. 황당한 사람이었다. 다방 레지가 와서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물었지만, 그 상황에서 무엇인들 마시고 싶었을까? 나는 “됐다!”고 말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자리를 벗어날 궁리를 하다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말을 하고 화장실로 급히 갔다. 내가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보니 그 사람도 일어나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화장실에서 나와서 화장실 오른쪽 커튼을 젖히고 들어갔다. 좀 전에, 자리에 앉았을 때 거기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커튼을 열고 들어간 곳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나는 무조건 그 계단을 올라갔다. 그 옥상에는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허름한 가건물이 있었다.

나는 문짝을 밀고 들어갔다. 다방 마담과 다방레지, D.J. 청년이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휴식 장소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내가 처한 상황에 관해서 설명했다. 나는 보험을 하는 사람인데, 보험을 들어준다고 여기로 데리고 와서는 보험을 들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느닷없이 자기 애인이 되어 달란다고 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친척에게 갔다가 그 사무실에서 쫓아온 사람이라는 것과 폭력을 행사할 낌새여서 화장실을 간다 하고 이리로 들어왔으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러자, 다방 마담이 힐난하듯 내게 물었다. “그러면, 아까 비싼 거라도 주문을 하지. 왜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때는 그럴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래도 그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다방 마담은, 도대체 왜 남자 XX들은 여자들만 보며 그렇게 잡아먹으려 드는지 모르겠다고 욕을 했고 D.J. 청년은 그 남자 상황을 보고해 주었다.

그 사람이 화장실에서 나와 다방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방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갔다가 하면서 난리를 치고 있다고 했다. 꽤 오랜 후에 다방을 나와서 마침 내 앞을 지나치는 택시를 잡아탄 후에 택시 안에서 그 동네를 바라보니,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나 보이는 것은 온통 여관 간판들뿐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집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르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저가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 91:1~3)

애초에 속죄 제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생이 살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다. 그리고 어미 뱃속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그 어미의 젖꼭지를 찾아 빨기 시작한다. 살기 위하여. 그리고 누구라도 외면할 수 없는 치열한 생존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여하히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개중에는 남의 것을 약탈하고 탈취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려는 인종들도 있다.

얼마나 멍청했는지, 나는 쌀도 집도 돈도 어디서 저절로 다 나오는 줄만 알았다. 책임감이 투철하신 아버지께서는 7남매나 되는 우리를 한 번도 굶기거나 헐벗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마솥에는 늘 흰쌀 밥이 가득했고, 사촌들까지 우리 집에 와서 몇 달 몇 년씩을 살았다, 매우 당연한 듯이. 우리 집만 서울에 있다는 이유였다. 절대 넉넉하진 않았는데도, 엄마는 집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불러들여 쪽마루에서 밥을 먹여 보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완전히 다른, “이~상한 나라”였다. 원래 잘생긴 남편은 아내가 평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거라고 아예 못을 박는 시어머니의 말씀이 결혼 초장에 있었고, 그 어머니 곁에 항상 붙어 앉아 있는 그 어머니의 외아들과 오빠는 아무것도 해 보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그 누이들. 왜들 그렇게 하나같이 당당들 한 것인지, 아들을 가진 어미와 오라버니를 가진 여자들의 권력이 그렇게도 막대한 것인지, 진실로 예전엔 미처 몰랐다. 나는 마치 잡혀 온 죄인이나 인질이었다.

그 황당무계한 상황을 홀가분하게 벗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결혼 3개월 만에 생명을 잉태한 어린 새댁은 옴짝달싹할 수 없이 그들의 며느리와 올케와 마누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게 되었고, 나는 하나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지뢰밭 같은 인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축복이었다. <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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