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 의견비를 3·1 만세터에 옮긴 의도는 뭐였을까

이완우 2024. 2. 2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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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상리 천변 자리 대신 원동산에 설치하게 된 배경 찾아보니

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사회, 문화, 역사, 설화와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스토리텔링으로 간략히 엮어갑니다. <기자말>

[이완우 기자]

 3·1 독립 만세 오수 함성터 기념비
ⓒ 이완우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의 오수 장터 앞에 '원동산'이란 작은 공원이 있다. 일제 침략기에 이 공원과 장터는 임실군, 남원군, 장수군과 순창군 등 인근 지역 주민들이 모여서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행동으로 표출하는 장소였다. 

오수 지역은 1919년 일어난 3·1 만세 운동 전국 10대 의거지 중 한 곳이다.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이 3월 10일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보통학교 학생으로는 전국 최초로 만세 운동을 시작했고, 3월 12일에는 임실읍내 2000여 명 군중이 만세를 외쳤으며, 3월 23일에는 인근 지역 주민까지 모여서 오수 원동산 공원과 장터를 중심으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자기를 사랑하는 주인을 위해 희생한 '오수의 개' 이야기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보은 설화 중 하나다. 과거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술에 만취한 채 자고 있을 때 불이 났다. 이에 그가 키우던 개가 주인을 깨우려 노력하다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이 설화 발상지는 원동산에서 북동쪽으로 800m 거리에 있는 오수천 부근인 상리 천변이다. 상리마을 숲에 있던 원래의 오수 의견비(義犬 주인에게 충성한 개)는 큰 홍수로 인해 유실되었다가 1920년대 말 전라선 철도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어 임시로 단장해 비를 세워놓았다.

이 비석은 높이 218cm, 상단 폭 98cm, 하단 폭이 96cm로 큰 규모이다. 앞면 아래쪽에 개 형상 무늬가 있고, 뒷면에는 고려 시대 추정 비석 건립의 시주자 60여 명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오수 의견 설화 발생지 (원래 의견비 세워졌던 곳, 현재 빈터
ⓒ 이완우
 
일제 침략기에 의견비가 있던 천변 숲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일제가 목재를 공출하려 무성했던 숲을 모두 베어냈다고 한다. 1938년 2월에 상리 천변에 허술하게 세워진 오수 의견비를 지역의 한 유지가 다시 새롭게 단장하려 했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비바람에 마모된 오수 의견비, 새롭게 단장할 계획
: 설화로 전해오는 오수개의 일명 오비(獒碑, 개비)가 외로이 비바람 맞아오기에 천년. 자기 주인 김개인을 살린 '의구(義狗)'라는 제목으로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에 실렸다. 이 개를 기리어 나무를 꽂고 돌을 세워 기념해 오던 개비가 남아 있는데, 이 지역 유지인 선천정길(船川定吉)씨가 발의하여 늦어도 오는 4월 이전에 그 터를 다듬고 새롭게 단장하여 고적으로 보존하기에 손색이 없게 하리라 한다.
(1938.2.16. 동아일보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인용하여 국한문 혼용체 문장을 의역함.)

그런데 원래 의견비가 있던 상리 천변에 새롭게 단장하려는 지역 주민의 계획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좌절된다. 그러다 1940년 5월에 일제 당국 주도로 현재의 원동산인 공원에 오수 의견비를 이전하여 설치하게 된다. 당시 기사 내용을 보면 '면 당국', '주재소 당국' 알선으로 옮기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오수 의견비, 공원(公園)으로 이전한다'
: 전북 오수에 선천정길의 발의로 김개인의 의견비를 새롭게 단장하려던 계획은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수천 제방공사 때문에 의견비를 다른 장소로 옮기지 않을 수 없어, 둔남면 협의원과 면 당국과 주재소 당국의 알선으로 인근 원동산 공원으로 옮기려 한다. 이로 말미암아 '개비'는 길이길이 보전하게 되리라.
(1940.5.14. 동아일보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인용하여 국한문 혼용체 문장을 의역함.)  

오수개 설화 발상지인 오수천변 상리에 있어야 할 오수 의견비가 왜 오수 장터 옆 원동산 공원으로 이전하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1945)과 태평양전쟁(1941~1945) 등 전쟁 수행에 군용 식량과 방한용 털가죽 확보가 필요하였다. 일제는 방한용 털가죽의 군수품을 조선 토종견의 가죽으로 충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개의 가죽을 쓰면 방한과 방습의 기능이 우수하다며 삽살개부터 도살을 시작하였다. 조선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연간 10만~15만 마리(실제는 연간 그 몇 배의 숫자로 추정)의 토종개들이 몰살되어 그 개 가죽이 공출되어 군수품이 되었다. 이는 확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일제는 '견피(犬皮)의 배급통제에 관한 법령(1939년)', '견피 판매 제한에 관한 법령(1940.3.8.)'과 조선원피판매주식회사 설립(조선총독부령 제26호) 등 법률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개가죽을 독점 유통하며 전국 곳곳에서 키우던 토종개를 박멸하였다. 조선 전역에서 토종개인 삽살개, 동경이, 풍산개와 진돗개 등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런 배경 가운데 박부양(朴富陽) 임실군수의 재직 기간(1937.9~1939.4) 중 나온 신문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피헌납에 희생된 개무덤(犬塚)을 건설, 임실의 충견보국 가화(佳話: 아름다운 이야기)'
: 황군(일본군)의 방한을 위하여 임실군민들은 자기들이 키우는 개를 조금도 아까운 마음 없이 헌납하게 되었다. 그 견피(犬皮)가 1600여 마리 되는데, 지난 5일에 육군창고로 발송하였다. 이러한 보국 충견 희생에 대하여 박 군수(朴君守)는 이러한 계획이 있다. '이번에 나라를 위하며 임실군 내에서 1600여 마리가 희생되었으나 개의 본질적 정신에 비춰보면 살해가 아니므로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개무덤을 짓고 비를 세워 기념하고자 한다. 마침 임실에는 오수(獒樹)라는 곳이 있어서 개의 유명한 전설이 있는 곳이니 오수의 뜻이 한층 더 새로워질 것도 사실이다.'
(향토 역사 블로그 '흘러가는'(https://jykimtax.tistory.com/)에서 사진 인용, 신문 이름과 날짜는 미상, 국한문 혼용체 문장을 의역함.)

즉, 일제강점기 중이던 1940년에 오수 원동산으로 의견비를 옮겨와 설치한 데에는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들 정도로 친일파로 알려진 당시 박 군수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원동산은 1919년 3월에 수많은 이가 모여서 만세 함성을 외친 곳으로 조선인들이 자주 모였던 장소이다. 여기에 의견비를 옮겨 세운 것은 원래의 취지에도 맞지 않다. 그런데 '오수의 뜻이 한층 더 새로워질 것'이라니... 조선 개들을 수없이 도살한 행위와 주인에 충성하는 오수 개 설화를 어찌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의견비를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을 합리화 하려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원동산 입구 건너편 공터 한쪽에는 2022년 광복절에 지역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조성한 '3·1 독립 만세 오수 함성의 터'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3·1 독립 만세 운동의 중심 무대였던 원동산 경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수 장터 한 귀퉁이에 서 있다. 오수 의견 설화의 발상지이자 의견비의 원래 터전인 상리 천변은 지금도 제법 넓은 빈터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고통받았던 백성들과 함께 이 땅의 개들도 피비린내 진동하는 수난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었음을 오수 원동산과 의견비에서 확인했다. 원동산과 의견비에 얽힌 아픈 역사를, 105주년 3·1절을 앞두고 '3·1 독립 만세 오수 함성터 기념비' 앞에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원동산에 설치하지 못 한 '3·1 독립 만세 오수 함성터 기넘비'와 길 건너 편 단장된 '오수 의견비의 원동산' 대조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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