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정벌 큰 공 세우고 벌 받은 윤관

김삼웅 입력 2024. 2. 27.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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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100] 국토를 지키고 강역을 확장한 고려의 명장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윤관장군 묘 웅장한 왕실의 무덤 같다
ⓒ 김수종
 
윤관(尹瓘)은 우리 역사상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만큼 국토를 지키고 강역을 확장한 고려의 명장이다.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수백 리에 고토를 회복하여 고려의 영토를 북쪽으로 크게 확장시킨 영웅이다. 국사책에서 배운 '9성(九城)을 축성'한 장본인이 바로 윤관 장군이다.

우리 역사는 이 출중한 명장의 태어난 연대도 알지 못한다.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로서, 예종이 전공을 높이 사서 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의 벼슬을 제수하며 위업을 포상하였던 인물인데도 말이다.

다만 문종 때에 등과하여 습유, 보궐의 벼슬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광주·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그의 출생 시기를 어림할 수 있을 뿐이다.

윤관의 인물됨은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특사로서 요나라에 파견되어 신왕의 즉위를 알리고, 1098년에는 다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 사실을 통고한 점으로 미루어 그 인품과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윤관의 인물됨은 문관의 역량뿐이 아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역대 왕들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을 국시로 내걸고 북진정책을 추진한 결과 서쪽으로는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도련포에 이르는 선까지 국토를 확장하였다. 

고려는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함경남도 정평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고 이를 경계로 여진족과 대치하게 되었다. 원래 여진족은 고대에 말갈 혹은 숙신이라고 불리던 종족으로서 뒷날 금(金)나라와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조상이다.

여진족은 오래 전부터 고려를 '부모의 나라' 또는 '상국'(上國)으로 받들고 조공하여 왔으며,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이나 물품을 주어 달래왔다. 고려에 귀화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우야소(鳥雅束)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고려의 국경 요새인 정주관 문 밖에까지 병력을 주둔하면서 두 나라는 잦은 충돌을 하게 되었다. 고려는 두 차례의 출병에서 참패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고려에서는 여진정벌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전패를 거울삼아 전투력을 증강하고 특수부대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거국적인 전쟁준비에 놀란 여진족은 사신을 보내 앞으로 일체의 도발을 중지하고 자손 대대로 고려에 조공을 할 것을 다짐해 왔다.

그러나 고려는 여진족의 거듭되는 화전 양면의 사술에 단호한 결전으로 맞섰다. 예종 2년 11월 여진족이 국경을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은 예종은 여진정벌을 명령했다. 

총사령관에는 윤관이 임명되었다. 행영대원수가 된 윤관은 오연총을 부관으로 삼아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했다. 인구 2백만 명도 안 되는 고려가 17만의 대군으로 여진정벌에 나선 것은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윤관은 파죽지세로 적을 공격하여 승전을 거듭하였다. 고려군의 막강한 위세에 눌린 여진군은 패주 끝에 주력부대가 섬멸되기에 이르렀다. 고려군은 적의 전략적인 거점 135개를 무찌르고 살상 4,940명, 생포 130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윤관은 평정한 땅을 고려 강역으로 편입시켰다. 동쪽으로 화곶령, 북은 백두산, 서쪽은 정주일대에 접하여 사방 3백리의 광대한 지역을 확보하였다. 

역내 중요한 곳에 성을 쌓고 남쪽지역 주민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살도록 하였다. 이렇게 축성된 9성의 위치는 영주(길주 부근), 웅주(길주  부근), 복주(서천 부근), 길주, 함주(함흥 부근), 공험진(경흥 부근), 통태, 진양, 숭녕 등이다. 이밖에도 의주, 평융, 선화 등에도 성을 쌓았고, 공험진에는 '고려지경'(高麗地境)이란 비를 세워 경계를 표하였다.

왕은 윤관의 공적을 기려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의 훈호를 내렸다. 우리 역사상 흔치 않는 고토회복의 전승장군에 대한 당연한 예우였다. 그러나 윤관은 이후 그 명예와 업적에 비해 결코 겪어서는 안 되는 변을 당하게 된다. 

여진족을 물리쳐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개선한 윤관은 백성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권력에 눈이 먼 조정 대신들에게는 크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임금의 총애와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막강한 군병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그가 두렵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이 없던 조정 소인배들이 윤관과 오연총 등 출정파를 시기하여 그들을 배척하는 여론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도 잇따랐다.
 
▲ 윤관장군 묘 파주시
ⓒ 김수종
 
이 무렵 생활의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은 고려에 9성의 환부를 애원하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고려 조정을 움직이려 들었다. 

여진족은 고려 조야에 화친과 9성 환부를 요청하는 한편 수시로 기습공격을 자행하여 많은 고려군과 민간의 희생을 가져왔다. 윤관이 다시 출병하였지만 적병의 기습에 적잖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여진족의 간특한 화친애걸과 기습전략에 조정대신들은 우선 윤관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9성 환부에 동조하고 나섰다. 윤관이 개척한 9성의 넓은 땅을 여진족에게 돌려주면 자동적으로 윤관 등의 공은 사라지게 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관의 공적을 시기하는 신료들은 이 기회에 출정파를 제거하고자 음모하여 최홍사·김경용 등이 주동이 되어 "윤관 등이 명분 없는 군대를 공연히 일으켜 싸움에 패하고 나라를 해롭게 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들에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에 예종은 처음에는 자기의 명을 받고 출전한 까닭에 이들을 벌 주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반대하다가 중신들에 이어 대간들까지 나서 상소하고 간관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집무를 거부하는 등 조신들이 심상치 않게 움직이자 마음을 바꾸었다.

예종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조정의 3품 이상의 문무관을 소집하였다. 이 때 몇 명의 신진 선비들만이 반대할 뿐 대부분의 신료들이 이에 찬동하고 나섰다. 

고려는 수많은 인명의 피해와 막대한 재정을 들여서 회복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조정의 결정이 나자 중신들은 다시 윤관을 모해하고 나섰다. 당초 9성환부 문제보다 윤관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윤관의 탄핵에 동조하였다.

그토록 힘들게 확보한 9성을 돌려주고 윤관과 오연총 등 승전장수들은 삭탈관직되고 공신의 칭호를 삭제당하였다. 

간신배들은 두 장수의 목을 벨 것을 거듭 주청하였지만 예종은 간신히 이를 묵살하고 죽이는 것만은 막아 주었다. 몇 해 후 이들에게 복직의 어명이 내렸지만 두 장수는 벼슬을 사양하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윤관은 예종 6년(1111) 5월 8일, 천추에 씻기지 않을 한을 안고 눈을 감았다. 출생연도가 명확치 않아 몰년의 나이 또한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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