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인사이트] 나는 아직도 가진 게 많다

이명희 2024. 2. 27.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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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정원 35년째 그대로인데
환자들 내팽개친 의사들 파업
국민들 납득하겠나

이기주의, 의사만의 문제아냐
맘몬 지배 받는 각박한 시대
소명과 윤리 되새겨야

부산 고신대 복음병원 옥상엔 옥탑방이 하나 있다. 6·25전쟁 중 피란민들을 위해 무료 진료소를 열고 인술을 펼쳤던 장기려 박사가 생전 기거했던 곳이다. 1950년 월남한 그는 이듬해 미군에서 천막 3개를 빌려 복음병원을 열고 부산으로 피란 온 행려병자들을 치료했다. 나무판을 수술대로 쓸 정도로 열악했지만 전쟁 통에 무료 진료소는 돈 없고 아픈 이들에게 생명줄이었다.

공짜로 병을 고쳐준다는 소문에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병원비가 없어 퇴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차비를 쥐여주며 도망시키기도 했다. 돈이 없는 이들은 그의 출근길에 일부러 쓰러져 있을 정도였다. 열이면 열 모두 직접 업어서 병원으로 데려갔고 치료해줬다.

장 박사는 1989년 한 방송사 대담에서 “하루에 100명가량 오는데 실수할까 봐 매번 기도하고 했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사람도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소명의식으로 장 박사는 1968년 부산에서 청십자의료보험을 시작했고 그것이 1989년 시행된 전국의료보험제도의 효시가 됐다.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로 불렸던 장 박사는 의사를 선택한 이유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1975년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고신대 복음병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평 관사가 전부일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월급을 나눠주고 평생을 집 한 칸 없이 살았다.

그러면서 그는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게 너무 많다”고 했다고 한다. 1995년 8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장 박사의 비문에는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도 1905년 프랑스 선교단의 보고서를 통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서른살에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됐다.

그는 7년 후 성직자, 대학교수, 음악가, 문필가로서의 지위와 명성을 내던지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원시림 속에 병원을 세우고 흑인들을 치료했다. ‘원시림의 성자’로 불렸던 그는 1965년 9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프리카 빈민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도에 헌신했다.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방침에 반발해 생사를 헤매는 환자를 내버려 두고 병원을 떠나는 전공의들을 보면서 직업의식과 소명의식을 다시 생각한다. 의료계는 의대생 증원이 세계 최고인 한국의 의료수준을 크게 떨어뜨리고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 눈에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연봉을 받는 의사들의 직역이기주의, 밥그릇 지키기로밖에 안 보인다. 의대 입학정원이 35년 전이나 똑같다는데 의료 수요가 급증하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그동안 5배가 늘었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하니 적재적소에 의사들을 충원하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2000년 의약분업 시행, 2014년 원격의료 추진, 2020년 의과대학 증원·공공의대 설립, 비대면 진료 육성 방침에도 의사들은 환자를 볼모로 삼고 파업 투쟁에 나섰다. IT 강국인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부터 원격의료 시장이 가능했지만, 원격의료가 오진을 조장할 수 있고, 대형병원만 수혜를 볼 수 있다는 의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수십년 시행이 늦춰졌다.

명예와 존엄이 돈 앞에, 물질 앞에 무릎 꿇는 현실을 목도한다. 소명의식이나 윤리의식이 오늘날 인간에게, 심연에라도 남아 있을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 내 밥그릇을 지키겠다는 집단이기주의는 비단 의사만의 문제는 아닐 터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들이 무너지고 행복의 잣대가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가 돼 버렸다. 성직자나 정치인, 공직자 등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이 희미해진 요즘이다.

정부는 집단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에게 29일까지 현장에 복귀하라고 최후통첩했다. 맘몬이 지배하는 각박해진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초심을 지키려는 의사들이 많이 있다고 믿고 싶다.

이명희 종교국장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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