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교회로 가는 길④]“기후위기에 눈 감고 지구탈출을 염원하는 못된 신앙”

손동준 2024. 2. 25.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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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와 새로운 도덕률 / 장준식 세화교회 목사
캐나다 앨버타주 폭스크리크 인근 산과 농지에서 지난해 5월 화재로 일어난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인간은 성공을 추구합니다. 교회도 성공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집합체이며 공동체인 교회에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이 땅의 수많은 교회가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각종 프로그램과 아이디어를 통해 성공을 추구해왔습니다. 교회의 생태계도 일반 집단의 생태계와 별반 다르지 않게 매우 경쟁적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호소력 있게 개발한 덕분에 성공했고, 어떤 교회들은 ‘예배, 선교, 봉사, 친교’ 등 전통적인 교회의 사역을 탁월하게 수행함으로써 성공했습니다. 또 어떤 교회들은 포스트모던 사회에 들어맞은 교회의 모습을 갖춤으로써 신선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성공을 일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교회들의 성공은 우리가 현재 마주치게 된 현실 앞에서 매우 무기력해집니다. “모든 개교회는 힘겨운 새로운 현실에 직면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 지속에 더는 의존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기후교회, 139쪽)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행위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듯 그 어떤 성공도 기후변화의 현실을 외면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교회는 ‘성공’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절대적으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덕률이 요청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 앞에서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삶의 지속성을 위해, 미래세대의 지속성을 위해, 교회 사역의 지속성을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만 할까요.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 목사는 지구와 이 땅 위의 생명을 위협하는 두 개의 집단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화석연료를 뽑아냄으로써 엄청나게 부자가 되는 소수의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피조물들을 쓰레기로 만드는 데서 이익을 얻는 발전된 산업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집단이 명시되고 있지만 실상 이것은 바로 ‘우리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발전된 산업국가에서 살며 화석연료를 소비하면서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거대한 쓰레기를 생산해 냅니다. 바로 ‘우리들’이 지구와 이 땅 위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급진적인 제안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대한 전환, 또는 놀랍게 거듭난 삶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이것은 기후위기 앞에서 인간의 생존을 모색하는 모든 ‘기후영성학자들(종교인이든 종교인이 아니든)’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 『회복력 시대』를 출간한 제러미 리프킨은 기후위기를 맞아 ‘회복력(Resilience)’을 키워드로 한 생존전략을 말합니다. ‘회복 탄력성’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 ‘Resilience’라는 용어는 ‘역경과 고난을 지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리프킨은 상생을 강조합니다. 산업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은 생태계의 다른 종들과 구별된 종(spices)으로서 다른 종들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왔으나, 이제는 인간도 지구 생태계에 종속된 하나의 종(one of them)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해(또는 원래대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적응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는 기후위기 앞에서 교회는 탄력적인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탄력적인’이라는 용어도 ‘Resilience’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 위기에 넘어지거나 휩쓸려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여 계속해서 번성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상호의존성’의 중요성과 체제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서술합니다. 우리 동양인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의존된 존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동양인의 삶이 서구화하면서 우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삶에 대한 가치, 즉 ‘상호의존성’의 가치를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동양인은 자연에 순응(적응)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왔습니다. 그러나 18·19세기를 거치면서 산업화 시대를 먼저 일군 서구인들에 의해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삶의 방식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았습니다. 지배와 착취가 난무했던 서구인들의 제국시대는 동양인들이 자연에 순응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던 것이죠.

그런데 기후위기 앞에서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일군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방식이 결국 얼마나 잘못된 삶의 방식이었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려고 합니다. 그 지혜란 바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의존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기후변화의 담론(discourse)을 이끄는 서구세계의 학자들이 쓴 책들을 참고하고 있지만, 사실 동양인으로서 우리 안에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삶에서 체득한 ‘상호의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에 직면해 다시 살펴보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삶의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를 앞서가는 삶의 방식이고, 올바른 도덕률에 근거한 정의로운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후변화의 담론을 이끄는 서구 생태학자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기보다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인에게는 회개가 필요하지만, 우리 동양인에게는 감사와 칭찬이 필요한 것이죠.

기후위기는 모든 형태의 불의를 강화합니다. 이렇게 불의가 증폭되고 있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빛을 발할 수 있는 이유는 교회가 이미 오랫동안 정의(Justice)를 교회의 특색으로 명시했으며 모든 불의에 반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기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의 말을 인용하여 짐 안탈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는 건설계획(building plan)을 가지고 왔지-그의 추종자들에게 땅 위에서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데 그와 함께하자고 확신시키기를 희망하면서-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살피라고 위탁하신 생명을 주는 피조세계로부터(죽든지, 혹은 우주선을 타고) 철수해 도망가자고 온 것이 아니다.”(기후교회, 144쪽) 기후위기로 인해 증폭되고 있는 불의에 눈감고 그저 어떠한 방식으로든(죽든지, 혹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탈출하기만 하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인에게 도덕적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불의에 맞서, 불의를 증폭시키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탄소생산의 진짜 비용과 탄소가 원인이 된 공해가 그 값에 반영되도록 탄소배출 기업들을 압박해야 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환하는 부담을 부자들이 공정한 몫을 내도록 요청해야 하며, 탄소의 진정한 값을 내는 부담을 가난한 자들에게 떠맡기지 않도록 주장해야 합니다.(기후교회, 151쪽)

기후변화를 마주하며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새로운 도덕률입니다. 도덕이란 내가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준점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행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그 수많은 행위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덕률’이라는 기준점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하는 행동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대개 알지 못해서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하지 못하지, 악해서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도덕률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전 지구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 힘을 모으는데 교회는 도덕적 나침반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외면하면 그 어떤 성공도 교회의 부흥이 아닙니다.

장준식 세화교회 목사

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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