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에 모피 입고…“잔인하게 대해주세요”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입력 2024. 2. 2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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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폰 자허마조흐의 ‘마조히즘’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소설가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이름이 여럿이다.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 톨스토이, 영문학의 아버지 셰익스피어, 미국 문학의 시대를 연 마크 트웨인, 인간 실존적 불안과 부조리를 묘사한 프란츠 카프카 같은 대문호의 이름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빼놓기 섭섭한 소설가가 있다. 19세기 활약한 오스트리아 소설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다. 이름이 생경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문학사보다는 정신분석학에 짙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피학적 성향. 그 유명한 ‘마조히즘’은 이 소설가의 이름에서 따왔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선사했다.

오랜 세월 자허마조흐라는 이름은 성적으로만 주목받아왔다. 그의 텍스트가 다시금 평가받기 시작했던 건 1968년. 프랑스 유명 철학자 들뢰즈가 그의 작품을 분석한 ‘마조히즘: 냉정함과 잔인함’을 출간하면서였다. 들뢰즈는 자허마조흐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한다. “마조히즘은 단순히 고통을 즐기는 것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자허마조흐는 복잡다단한 인물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피학성애 다룬 ‘모피를 입은 비너스’

고통과 복종을 미학으로…대중에도 인기

자허마조흐는 1836년 오스트리아 렘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제국 경찰청장,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귀족 여성, 집안 종교는 독실한 가톨릭. 신분과 종교의 조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보수적 가풍 속에서 자랐다. ‘자유’라든가 ‘개성’이라는 것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좋은 가문의 반듯한 아들로서 가면을 벗어던진 건 그가 대학에 입학한 1854년부터였다.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그라츠에서 법학·수학을 전공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다. 자허마조흐는 역사 속 인물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쌓아갔다. 오스트리아 민속과 문화를 잘 녹여낸 덕분에 평가도 좋았다. 그의 주변에는 자유분방한 예술가 친구들이 여럿 모였다. 그는 곧 문학이라는 이름의 자유에 빠져들었다.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헨릭 입센이 자허마조흐의 작품을 높게 평가했다. 그의 이름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1870년은 자허마조흐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였다. 대표작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출간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세베린이라는 남성이 있었다. 그는 완다라는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괴이쩍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당신의 노예가 되고 싶소”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점점 더 가학적인 행위를 요구했다. 알몸에 모피를 입은 채로 자신을 채찍질해달라는 것. 세베린은 완다에게 가혹 행위를 당할수록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물론 완다의 마음은 다르게 흘러갔다. 예나 지금이나 때려달라는 변태를 견딜 수 있는 여인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럼에도 세베린은 “정조를 잃은 아름다운 여인과 폭정 그리고 잔인함. 이 세 가지만큼 내 욕망을 자극하는 건 없다”며 굽히지 않았다.

그의 소설은 꽤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고통과 복종을 미학적으로 승화한 데 대한 대중 반응은 뜨거웠다. 불과 100년 전 사드의 작품이 처음 등장했을 때 악평이 쏟아진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문학사에서 족적을 남기기 직전, 그의 작품은 정신의학계에 먼저 화제가 됐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리차드 본 크래프트 에빙 덕분이었다. 1886년 그가 성적 병리학을 정리한 책 ‘사이코패시아 섹슈얼리스’를 발간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성도착증을 설명하고자 시도한 책이었다. 가학성애와 피학성애를 설명하면서 ‘사디즘’ ‘마조히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문학을 좋아했던 에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저서에서 ‘마조히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특정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하면서 느끼는 성적 감정’. 자허마조흐는 자신의 소설 작품이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것에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오스트리아 소설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초상(사진 오른쪽). 왼쪽은 그의 대표작 ‘모피를 입은 비너스’ 표지.
자허마조흐 스스로도 ‘마조히스트’

딸에게까지 “채찍으로 때려달라”…전위적 시선, 후대엔 높이 평가

자허마조흐는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은 작가였다. 자허마조흐 본인 자체도 고통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 역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그는 젊었을 적 파니 피스토어라는 귀족 출신 과부와 연애했다. 두 사람은 서약서를 교환했는데, 자허마조흐가 그녀의 성노예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파니가 잔인하게 그를 대할수록 그의 주요 부위는 더욱 빳빳해졌다.

과부인 파니와 이별한 뒤에도 피학적 성애는 계속됐다. 아내 오로라에게 채찍으로 때려달라고 애원했을 정도였으니. 자허마조흐 본인이 사냥감이 될 테니, 사냥꾼처럼 자신을 쫓아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딸 샤샤 앞에서 자신을 때려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그는 망가지고 있었다.

오로라는 더 이상 남편을 견디지 못했다. 자허마조흐가 신문 광고에 아내인 오로라와 성관계를 할 힘센 남자를 구한다고 한 날, 그녀는 이혼을 결심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는 자허마조흐의 삶과 가치관이 그대로 투영된 셈이다. 후대 철학자들은 사드에게 그러했듯, 자허마조흐를 단순히 ‘변태적 인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약자에 대한 감수성도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유대인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랬다.

자허마조흐는 19세기 중반부터 점점 독버섯처럼 퍼진 ‘반유대주의’에도 공개적으로 맞서 싸웠다. 어렸을 적 살았던 갈리시아 지방에서 영주에 대한 농민 반란을 본 뒤로 그는 언제나 약자를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비스마르크 체제의 독일을 비판한 것도 그였다.

소설 속 그의 전위적 시선도 철학자들이 높은 평가를 내리는 요소였다. 오늘날 기준으로도 높은 여성 평등 의식이 그랬다. 마조히즘은 남성 스스로 강한 여성에 예속되기를 원하는 피학적 성향이다.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이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은 것이다. 남녀 성 관념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이 대목에서 철학자들은 여성 해방의 가능성을 감지한다.

그의 말년은 결코 행복하진 않았다. 끊임없는 쾌락을 추구하다 50대 초반에 정신병을 앓게 된다. 1895년 독일 헤센주 린드하임에서 사망했다.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까지도 반유대주의에 저항하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변태’라는 단어만으로 그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배경이다. 오늘날 그의 텍스트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미술계에서도 ‘마조히즘’은 하나의 주요 키워드다. 1960년대 크리스 버든과 비토 아콘치가 피학적 신체 미술을 선보여 마조히즘적 미술(Masochistic Art)의 시대를 열기도 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리메이크되는 이유 역시 그가 복잡다단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 도덕과 방탕을 동시에 지닌 우리 모두처럼.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7호 (2024.02.21~2024.02.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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