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팬들의 트럭시위, 축구협회 향한 '경고'
[이준목 기자]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차기 감독 선임 이슈가 2024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K리그를 뒤흔들고 있다. 축구협회의 '현직 K리그 감독 빼가기' 가능성이 현실화되면서 분노한 K리그 팬들도 급기야 행동에 나섰다.
프로축구 K리그1 울산 HD 서포터스 '처용전사'는 지난 2월 23일 종로구 축구회관 앞에서 대한축구협회를 겨냥한 트럭 시위를 벌였다. 울산 서포터즈는 "졸속 행정의 결말은 K리그 감독 돌려막기" "필요할 때만 소방수 홍명보 감독은 공공재가 아니다" 등의 전광판 문구를 통해 협회의 졸속 행정을 규탄했다. 또한 SNS와 축구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울산 팬들에게 공감하며 협회를 성토하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정해성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장은 지난 21일 경질된 클린스만의 후임으로 3월 내에 새로운 국가대표팀 감독을 선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재로서는 국내 지도자가 우선 순위가 유력하다고 가운데, 홍명보 울산 감독과 김기동 FC서울 감독, 김학범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 등 현직 K리그 사령탑들의 이름이 대거 거론되고 있다.
특히 정 위원장이 "K리그 감독이 선임될 경우 클럽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논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 사실상 현직 K리그 감독이 차기 대표팀 사령탑으로 이미 내정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특히 축구협회 전무 출신이고 이미 대표팀 감독 경험도 있는 홍명보 울산 감독이 가장 유력한 1순위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홍 감독은 지난 21일 대표팀 감독 부임설에 "제가 아는 게 없다. 말씀드릴 것도 없다. 그것이 지금 제 상황"이라고 처음으로 공식입장을 밝히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대표팀에 제안이 와도 가지 않을 것'이라는 더 확실한 입장표명을 기대했던 울산팬들의 의구심은 더 깊어졌다.
▲ 프로축구 K리그1 울산 HD 서포터스 '처용전사'가 23일 오전 8시부터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 앞에서 대한축구협회를 겨냥한 트럭 시위를 벌이고 있다. |
ⓒ 울산 서포터스 처용전사 제공 |
울산팬들만이 아니라 K리그 팬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축구협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K리그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무원칙한 관행 때문이다. 현재 K리그 개막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다. 지난해 챔피언인 울산은 지난 21일 이미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16강전을 치르면서 이미 새 시즌에 돌입한 상황이다. 또다른 후보군으로 꼽히는 김기동 감독과 김학범 감독은 올 시즌 팀의 지휘봉을 새롭게 잡으며 아직 공식 데뷔전조차 치르지 않은 상태다.
기존 감독 아래 동계 훈련까지 마치고 새시즌 출항만 앞두고 있는 K리그 구단들로서는, 협회의 요청으로 하루아침에 감독을 빼앗기게 되면 엄청난 혼란이 불가피하다. 감독들 입장에서는 국가대표팀 사령탑이라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갑자기 찾아오는데 유혹을 거절하기가 어렵다. 설사 소속팀에 충실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하다고 해도, 협회의 압박을 거부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축구협회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K리그에 협조를 요청한다지만, 애초에 이런 위기상황을 초래한 것은 협회가 자초한 실책이다. 전임 클린스만은 능력에 대한 의구심은 물론이고 선임 절차에 있어서도 각종 의혹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클린스만은 1년도 안되어 아시안컵의 부진과 근무태만, 선수단 관리서까지 온갖 문제만 일으킨 끝에 경질당했다.
하지만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협회 지도부는 클린스만 사태에 대하여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제와서 사태가 다급해지자 K리그로 눈을 돌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K리그 팬들의 비판이다.
이와 비슷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2011년 전북 현대와 최강희 감독이 있다. 당시 대표팀은 조광래 감독이 레바논전 패배로 경질되고 대표팀이 3차예선에서 탈락할 위기에 놓이자 부랴부랴 소방수로 당시 K리그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최강희 감독을 구원투수로 영입했다.
하지만 정작 최 감독은 대표팀 감독직을 원하지 않았다는 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결국 협회의 거듭된 회유와 압박으로 마지못해 대표팀 지휘봉을 잡기는 했지만, 최 감독은 '최종예선까지만 대표팀을 맡겠다'는 폭탄선언을 터뜨렸다. 졸지에 최 감독을 잃은 전북은 울며 겨자먹기로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이흥실 감독대행을 선임해야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최강희 감독과 전북, 대표팀에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 최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최종예선을 통과하며 겨우 브라질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저조한 경기력과 선수들의 항명 논란 등으로 '시한부 리더십'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현재 축구팬들이 반발하는 또다른 이유는, 무리해서 K리그 현직 감독까지 빼가야할 만큼 대표팀 상황이 다급한 것도 아니다. 2011년 최강희 감독의 경우, 대표팀이 당장 다음 경기인 쿠웨이트와의 3차예선 최종전에서 패한다면 조기탈락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단두대 매치'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반면 현재의 대표팀은 다음 A매치가 3월 태국과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2연전이다. 한국은 조 1위를 달리고 있어서 태국전 결과와 상관없이 2위까지 주어지는 최종예선 진출은 유력한 상황이다. 더구나 태국전 이후 다음 A매치는 6월에 열린다.
부담이 덜한 태국전까지는 일단 '임시 감독' 체제로 치르더라도, 다음 A매치 기간까지 신중하게 정식 감독을 선임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 현재 한국대표팀 감독직에 관심을 보이는 외국인 감독들도 나오고 있어서 섣불리 국내파로 후보군을 좁혀야 하냐는 일부 의견도 있다.
이런데도 협회가 또다시 축구팬들의 여론을 무시하고 K리그 현직 감독을 대표팀 감독으로 데려온다면, 이는 클린스만 선임만큼이나 또다른 오점으로 남을 확률이 높다. 비슷한 실패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축구협회는 축구팬들의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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