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노동의 재발견

박상은 2024. 2. 24.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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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은 사회부 기자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건 2017년이었다. 매년 한국사회 트렌드를 전망하는 서울대 김난도 교수 연구팀은 2018년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워라밸 세대’를 꼽고 이들을 1988~1994년생 직장인으로 정의했다. 나 역시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워라밸 세대 중 한 명이었다. 조직에 희생하기보다 ‘나 자신’ ‘여가’ ‘성장’을 중시하는 세대. ‘칼퇴근’을 당연하게 여기고 ‘저녁이 있는 삶’을 지향하는 세대 말이다.

세상의 기대와 달리 나는 오후 6시 정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소신 있는 젊은이는 아니었다. 밥 먹듯이 하는 회식도 사회생활의 일부라 여기곤 했다. 기자의 업무가 생활과 분리될 수 있느냐는 선배의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어리숙한 사회초년생의 눈에도 보였던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이들의 인생에 ‘출근’만 있고 ‘퇴근’은 없다는 사실이. 김난도 교수는 당시 워라밸 세대를 설명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 유난히 눈에 띈다는 점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균형이 심각한 수준으로 무너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물론 워라밸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양하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2018년 공개행사에서 워라밸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과 생활을 저울에 올리고 균형을 맞춘다는 건 한쪽을 택해 플러스가 되면 다른 한쪽은 마이너스가 되는 거래 관계가 되는 것’이라는 시각이었다. 방탄소년단(BTS)을 키워낸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도 지난해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노동이 삶의 적인 것처럼 느껴져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회사에 있는 시간과 퇴근 후 시간의 가치가 다르다고 설정하면 마치 ‘일하는 나’는 ‘행복한 여가’를 위한 보조적인 자아에 불과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월급루팡(월급도둑)이라는 직장인들의 농담은 이런 자조적인 마음에서 파생된 것은 아닐까 싶다. 하루 24시간 중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써야 하는 ‘일’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인생을 쏟아붓는 ‘노동’이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다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무엇보다 직장 경력이 쌓일수록 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으려는 고민만큼 ‘일하는 삶’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더 커지곤 한다. 물론 이 역시 워라밸이라는 가치관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직장 문화를 상당 부분 바꿨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워라밸 대신 ‘워라블’(Work-Life Blending·일과 삶의 조화)을 추구해야 한다는 글이 여럿 보인다. 방시혁 의장은 블렌딩 대신 ‘하모니’라는 단어를 붙여 ‘워라하’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의미는 같다. 특히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Z세대는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며 일과 삶의 기쁨을 일치시키는 특성이 있다고 분석하곤 한다. 일을 단순히 경제활동 수단으로 여기기보다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이를 통한 가치 실현 및 성장의 계기로 여긴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취미를 직업으로 삼는 ‘덕업일치’다.

한데 ‘워라블’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그것을 단지 Z세대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일을 통한 성취와 성공, 가치 실현, 자기 계발은 일을 하는 본질에 가까운 개념이다. 대기업 부사장을 지내고 개인책방을 운영하는 최인아 대표는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는 책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이후에 개인을 성장시키는 요소가 일이라고 적었다. “저는 (일한 대가로) 돈 말고도 여러 가지를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미, 의미, 성취, 도전, 성취감과 자신감, 갈등, 스트레스, 기쁨, 인정, 동료애, 팀워크, 극복, 성공…. 우리가 일에서 맛보고 누리며 가져가야 할 것은 돈 이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며 더 이상 일에 대한 가치관과 고민은 젊은 세대에게 국한된 문제는 아닐 테다. 20대에게도, 30대에게도, 은퇴를 앞둔 5060세대에게도 ‘어떤 마음으로 일할 것인가’ ‘어떤 자세로 일을 대할 것인가’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그런 고민을 거쳐 결국엔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로 가닿을 수 있길, 오늘의 내가 수십년 후의 나를 그런 길로 이끌 수 있길 바라본다.

박상은 사회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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