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대표팀 새 감독, 외국인 말고 한국인이 정답일까
[이준목 기자]
위기에 빠진 한국축구 대표팀을 재건할 새로운 리더가 누가 될지 축구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최근 정해성 신임 전력강화위원장을 임명하고 새로운 대표팀 감독 선임에 대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정해성 위원장은 여기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임시 감독이 아닌 정식 감독을 선임할 것과 '국내파 감독'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렇게 되면 한국축구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이끌었던 신태용 감독 이후 6년 만의 한국인 감독 체제로 회귀하게 된다.
또한 정 위원장은 새로운 대표팀 감독의 자질을 평가할 수 있는 8대 조건으로 ▲ 전술적 역량 ▲ 취약 포지션의 선수 육성 능력 ▲ 지도자로서의 검증된 성과 ▲ 풍부한 대회 경험을 갖춘 경력 ▲ 선수및 축구협회와의 소통 능력 ▲ 젊은 세대를 아우를 리더십 ▲ 최상의 코치진 구성 능력 ▲ 대표팀을 이끌고 성적을 낼 수 있는 능력 등을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비록 정 위원장은 외국인 감독도 후보에서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현실적으로 빈말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전임 위르겐 클린스만이 저지른 각종 기행과 파행으로 인해 책임감 없는 외국인 감독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상태다. 여기에 협회가 클린스만과 코치진에게 지급해야할 위약금 문제가 남아있는 것도, 몸값이 비싼 새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기 어려운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일각에서 제기되던 임시 감독 대신 다음 A매치에서 바로 정식 감독을 영입하겠다는 협회의 방침을 감안할 때, 외국인 감독과 협상하거나 새로운 감독이 한국 선수단을 파악하기에는 어차피 시간이 촉박해보이는 게 사실이다.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국내파가 낫냐, 외국인이 낫냐'는 논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네덜란드)의 영향으로 한국 축구에는 한동안 '외국인 명장에 대한 판타지'가 존재했다. 하지만 울리 슈틸리케나 클린스만 같은 실패 사례를 통해 국내파보다 더 무능한 외국인 감독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 국내파 감독중에서도 허정무나 신태용처럼 대표팀에서 나름의 성과를 남긴 감독들도 존재했다.
진짜 문제는 지도자의 국적이 아니라, 감독으로서 개인의 자질, 그리고 감독이 자신의 축구철학을 소신껏 구현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의 여부다. 나란히 원정 16강을 달성한 파울루 벤투와 허정무 감독의 공통점은 장기간 대표팀을 이끌면서 자신의 선수단과 축구철학을 실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는 점이었다.
아시안컵 대참사와 선수단 내분 사태를 초래한 클린스만호의 실패는, 외국인 감독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클린스만 개인의 자질 부족, 그리고 제대로 된 감독 검증 시스템이 무너진 축구협회 내부의 문제였다.
설사 히딩크급은 아닐지라도 월드컵 단골손님인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직에 관심을 가질만한, 유능하고 몸값도 합리적인 외국인 감독을 찾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성공한 감독이었던 히딩크나 벤투의 사례에서 보듯이 외국인 감독만의 국제적 경험과 위상, 인맥 네트워크 등도 중요한 메리트였다. 경솔하게 클린스만같은 인물을 데려오는 실책을 저질렀던 협회가 이번에는 여론에 쫓겨 정반대로 '외국인 감독을 후보군에서 배제한다'는 방침을 섣불리 정했다면, 이는 오히려 또다른 자충수가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국내파 감독을 선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에 걸맞는 명분과 절차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국내파 감독들의 아킬레스건은 외국인 감독에 비하여 저평가를 당하는 선입견이 심하고, 여론과 외풍에 시달리기 쉽다는 것이다.
협회가 제시한 조건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 차기 대표팀 감독 후보로 전망되는 인물로는 홍명보·황선홍·최용수·신태용·박항서·김학범 감독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모두 저마다의 일장일단을 지닌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홍명보 감독은, 울산 현대의 2연패를 이끌며 현재 K리그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런던올림픽 동메달-브라질월드컵 대표팀 감독 등 국제대회 경험도 있다. 특히 선수 시절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출신으로, 유럽파가 주축이 된 현재의 대표팀 선수단도 장악할 수 있을만한 권위를 갖췄고, 축구협회 전무까지 지내며 협회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신태용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도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지휘봉을 잡고 '카잔의 기적(조별리그 독일전 승리)'을 이끌었던 A대표팀 유경험자다. 김학범 제주 감독과 황선홍 올림픽대표팀 감독도 모두 23세 이하 대표팀 전-현 감독으로 확실한 성과를 낸 경험이 있고, 현재 축구대표팀의 주축 선수들 대다수를 이미 지도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게 다른 후보들보다 유리한 대목이다.
김기동 FC서울 감독이나 최용수 전 강원 감독은 A대표팀 지도 경험은 없지만 모두 K리그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감독들이다. 김기동 감독은 뛰어난 전술적 역량, 최용수 감독은 선수단 장악과 소통능력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 박항서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팀에서 히딩크호의 수석코치로 4강 신화에 기여했으며, 최근까지 베트남 대표팀의 최전성기를 이끌며 풍부한 국제전 경험과 국내 축구계에서 높은 인망을 얻고 있다는 게 장점이다.
반면 결격 사유들도 저마다 뚜렷하다. 홍명보 감독은 브라질 월드컵을 지휘할 당시 역대 대표팀 감독 중 최악의 승률을 기록했고, 유럽파와 국내파에 대한 차별로 '의리축구' 논란을 일으키는 등, 사실상 한국축구 대표팀의 암흑기를 초래한 시발점이라는 오명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물론 10년 전에 비하면 감독으로서의 경험이 많이 쌓였다는 점에서 명예회복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다.
김기동 감독이나 최용수 감독은 클럽팀 경험도 있고 대표팀과 국제대회 경험이 없다는 게 가장 약점으로 거론된다. 박항서 감독은 세계 축구의 비주류인 베트남을 장기간 지휘하며 언더독 돌풍을 일으켰지만, 현대 축구의 트렌드나 지금의 한국축구 대표팀에도 부응하는 리더십을 갖췄는지는 평가가 엇갈린다.
가장 큰 걸림돌은 후보로 거론되는 국내파 감독 중 대다수가 '현직'이라는 점이다. 홍명보, 김학범, 김기동 감독은 모두 현재 K리그 구단의 지휘봉을 잡고 있다. 심지어 김학범-김기동 감독은 새롭게 팀을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정해성 위원장은 "현직 프로구단 감독이 후보가 될 경우, 구단의 양해를 구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사실상 특정 인물이 내정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최강희나 조광래, 박성화 전 감독 등의 사례를 기억하고 있는 K리그 팬들은 이미 2024시즌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협회가 또다시 '감독 빼오기'를 시도할 조짐에 벌써부터 크게 반발하고 있다.
황선홍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은 올해 올림픽 대표팀이 2024 파리올림픽 본선진출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 A대표팀을 맡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다. 과거에는 허정무나 고 핌 베어벡 감독처럼 올림픽과 A대표팀을 겸직한 사례도 있었지만, 현재 시스템과 일정상으로는 무리라는 평가다.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할 때 국내파 감독 중에서 현재로서 가장 무난하고 합리적인 대안은, 최용수 감독이나 신태용 감독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주요 후보군 중 최 감독은 유일하게 현재 맡은 팀이나 직책이 없어서 당장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지난 시즌 중반까지 강원을 이끌었기에 현장 감각의 문제도 거의 없다.
신 감독은 2020년부터 인도네시아를 이끈지 벌써 3년이 넘었고 아시안컵에서는 16강진출이라는 성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만일 대한축구협회가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와 위약금 등의 문제만 대신 정리해줄 수만 있다면, 한국축구가 신 감독을 다시 데려오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할 수 있다. 신 감독은 손흥민 등 현재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을 모두 지도해본 경험이 있고, 연령대별 대표팀에서 A팀까지 모두 구원투수로 활약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이다.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는 토요일인 24일에 열리는 2차 회의를 통해 차기 감독 후보군에 대한 구체적이고 진전된 내용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다음 달 21일과 26일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태국과 2연전을 앞두고 있다. 축구 팬들은 부디 협회가 이번엔 제대로 된 '감독 선임 프로세스'를 복원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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